故 김동리와 함께 한 삶…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헌신적 사랑너무 아파서 피해 온 자신의 내면사적 감정은 가급적 배제하고 담아"회상의 고통으로 수차례 덮을까 했지만끌어안지 않으면 한발도 못 나가는 게 사랑"
"사십 몇 년간 살고 쓰고 사랑하고 보니 그 안에 내가 문학을 통해 찾아온 구도의 과정이 담겨 있네요. 그걸 놔두고 계속 다른 소재로 글을 써왔더군요. 그게 성에 차지 않아 자전적 요소를 하나의 구도 프레임으로 삼고 정면으로 다루게 됐습니다."
고 김동리(1913~1995)의 마지막 반려이자 40년 넘게 작가로 살아 온 소설가 서영은(71)이 고인과 함께 보낸 지난한 삶을 픽션으로 옮긴 (해냄 발행)를 최근 출간했다. 10년 전 계간 가을호에 발표한 동명의 중편소설을 늘린 것으로 작가가 이후 14년 만에 출간하는 일곱 번째 장편소설이다. 그는 4일 기자간담회에서 "이 작품이 다루는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고 살아낸 사랑"이라며 "'살아낸 사랑'이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생이 주는 시련과 고난 등이 스며들면서 그것을 끌어안지 않고는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 사랑"이라고 설명했다.
소설은 두 번째 아내와 사별한 70대 노인 박 선생의 세 번째 아내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40대 여인 강호순의 내면을 3인칭 시점으로 그린다. '50, 60대 시절, 대학에서 맡고 있던 직함 외에도, 중요한 직함만 일고여덟 개 이상'이었던 남자의 외도 상대였다는 것만으로도 호순의 사랑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다. "우리 박 선생 불쌍한 사람이야. 잘 지켜줘"라는 말을 남긴 뒤 세상을 떠난 전처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호순은 아내로서 응당 누려야 할 것들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한 채 그늘과 구석을 오가며 삶을 견뎌 낸다.
몇 장만 읽어도 애처로울 정도로 또렷이 드러나는 호순의 맹목적인 애정과 달리 박 선생의 사랑은 모호하다. '사랑은 목숨 같은 거야. 목숨을 지키려면 의지를 가져야 해'라고 말했던 남자는 결혼 후 재산을 도난 당하지 않기 위해 밤새 잠자지 않고 집을 지키는 아주머니를 고용할 정도로 의심과 두려움이 많고 인색하기 짝이 없는 노인, 때로는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노인일 뿐이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노인이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면서 작품은 갑자기 1인칭 시점으로 바뀐다. 조롱과 비웃음, 학대를 무릅쓰고 남편의 병간호를 하는 호순은 "당신처럼 위대한 천재의, 평생토록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을 '나'라는 제물로 끝내고 싶군요"라고 말한다.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헌신적인 사랑의 고백이다.
이야기 전개나 인물 대사는 대부분 사실에 기초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실제로 20대 중반에 김동리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서영은은 10년여의 연애 끝에 1987년 결혼했지만, 남편은 결혼 3년 만에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5년 뒤 세상을 떴다. '작가의 말'에서 서영은은 '가능하면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작가로서, 삶의 진실, 인간성의 깊이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도록 노력했다'고 했다.
서영은은 간담회에서 "흘러간 시간을 회상할 때 많이 아프기도 하고 고통스러워 몇 차례나 덮어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런 아픔이나 고통을 넘을 수 있었던 건 (내가 겪었던 일을) 객관화해서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 따라줬기 때문"이라며 "작품을 통해 제가 많이 느껴졌다면 그건 소설 쓰기가 실패했다는 뜻"이라고 했다. 1인칭이 아닌 3인칭을 택한 건 고백체가 되면 삶과 인간성의 깊이를 담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을 "아프거나 고통스러워서 외면하고 피해 온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는 자리까지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
는 3, 4부작이 될 긴 여정의 서막이다. 구도 과정에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 첫 번째 획이 두 번 정도는 더 이어져야 맥락이 잡힐 것이라고 작가는 생각했다. "꽃은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움의 절정이지만 식물에게는 상처의 한 모습입니다. 휠체어 부분이 1인칭으로 바뀐 이후부터 꽃이 져서 열매가 되는 과정을 그린 또 한 권의 책이 필요합니다. 또 한 권의 책은 그 열매가 다시 씨앗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담으려고 해요. 그러면 꽃으로 상징되는 삶을 구도의 시작과 끝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