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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2월 4일] 그랬다

입력
2014.02.0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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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내 기억이 새겨지기 시작한 이후 아버지께서는 정기적인 수입이 있는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으셨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아버지 연세를 역산해 보니 40세. 그러니까 가장으로서 지출이 매우 많은 시기를 지나고 있었지만, 직업은 무직이셨다.

그렇지만 집에는 늘 다섯 가지 이상의 신문이 배달되었다. 오늘날 다섯 남매가 한두 권 이상의 책을 자기 이름으로 갖게 된 것은 온전히 그 덕일 것이다.

"신문 하나 안 보는 집안 아이를 지도자로 키우겠다고요? 오늘 당장 신문 보세요.",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데 왜 돈 내고 봐요?".

오늘날 더 많은 부모가 이렇게 사는데, 평생 백수이셨던 분은 오늘도 다섯 개 신문을 구독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학벌도 없고 돈도 벌지 못했다. 너희는 반드시 좋은 학벌 얻고 돈 많이 벌어서 고생하지 마라." 대신 "이웃과 사회를 위해 일해라. 개, 돼지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산다. 인간이라면 남을 생각해야 한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어라."

그랬다. 평생 백수로 사셨지만 다섯 남매는 자기가 원하는 만큼 공부했다. 훗날 가족을 갖게 되면서 나는 깨달았다. '그건 기적이야.' 열 살 무렵 돌아가신 아버지와 땅 한 마지기 갖지 못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후 남의집살이로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었던 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건 기적일 것이다.

그랬다. 후에 가장이 되어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던 둘째 아들만 보면 말씀하셨다. "더 이상 욕심내지 마라. 먹고 살면 됐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돈의 끝을 보고야 말겠다며 기를 쓰는 이들로 넘치는 세상에 끝없이 "만족해라" 하는 말씀을 듣는 일은 낯설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자식들도 아닌데 왜 만족해야 할까? 하는 의문은 늘 남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오늘, 풍요 대신 만족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일지 모른다.

그랬다. 집안에는 그 흔한 그림 하나 장식품 하나 없었다. 도대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책은 많았지? 그 많은 책도 알고 보니, 훨씬 많은 책들이 불온한 시대의 외줄 타기에서 낙마한 후 태워지고 버려지고 마지막까지 남은 일부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평안한 시대에 텔레비전에서는 값비싼 장식품과 수집품으로 가득한 책 안 읽는 이들의 집안을 공개한다. 책 없는 집안을 부끄러워하는 이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아니, 책 안 읽는 이가 오히려 자랑스럽게 외친다. "책 안 읽는 게 뭐 어때? 책 읽는 네가 잘하는 일이 뭐니? 잘난 체하는 것 빼고." 나는 이런 시대에 책 내는 일에 평생을 걸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대학 3학년 무렵에. 그렇지만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직장생활을 끝내며 어린 시절 꿈을 이루겠다고 외치는 둘째 아들을 만류하지 않으셨다.

설날 뵌 아버지는 예전과 같은 힘의 소유자는 아니셨다. 파킨슨병과의 지루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고, 이 평안한 세상에 나이 많은 이들에게 가해지는 정치적 편견과도 싸우고 계셨다. 아, 세상이 더 나아져야 한다고, 더 나아질 것이라고 구십 평생 이어져 온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듯 좌충우돌하는 자들을 바라보는 것 또한 힘겨운 싸움이다. 생각이라는 걸 조금이라도 하는 이라면 그들 모두가 눈앞의 이익만을 쫓는다는 사실을 다 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하지 않기에 모두 모를 거라 믿는다. 자신들의 거짓 애국에 모두가 속아 넘어갈 거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일정 부분 사실이다. 오늘날 세상은 지성과 지혜 대신 탐욕과 무지가 지배하니까. 세상을 지배하는 그런 무지와 맞닥뜨리는 것 또한 고통스러운 싸움이다.

아버지! 그렇다고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한 책 내는 일을 그만두고 술 팔고 빵 팔아 지갑을 채울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그 싸움, 지레 포기하지 마세요. 역사는 반드시 기록할 거예요. 거짓으로 무장한 정치인일수록 더 깊고 강하게 기억될 거예요. 현실적으로도 그럴 거예요. 나보다는 남을 생각하고, 고집보다는 정의를 소중히 여기는 이가 공복(公僕)으로 봉사할 날이 반드시 올 거예요. 아버지 생전에.

김흥식 서해문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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