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 직후 미국 서부에 살던 일본계 미국인들은 느닷없이 집으로 들이닥친 요원들에게 끌려 나갔다. 무슨 혐의인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허겁지겁 손가방 몇 개만 챙겨 나온 이들이 잡혀간 곳은 콜로라도 등에 있던 임시수용소. 직장과 학교 생활은 한 순간에 끝이 났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제한됐고, 통금이 실시됐다. 다시 미국 전역의 수용소로 옮겨진 뒤에는 가족끼리도 격리됐다.
■ 일본계라는 이유로 잠재적 반역자나 간첩으로 몰린 때문이었다. 당시 서부지역의 일본계는 12만명. 이중 3분의 2가 시민권자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어떤 헌법적 권리도 허용되지 않았다. 미국 전역의 10여개 수용소에서 이들은 수년 간을 감시타워와 철조망 아래서 살았다. 1988년 미국 의회는 어떤 혐의로도 기소되지 않은 이들의 유족에게 배상했고, 2년 뒤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사과의 편지를 보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불법구금 명령을 내린 지 무려 47년만이었다.
■ 2007년 위안부 결의안과 지난달 위안부 법안 통과에 주도적 역할을 한 마이크 혼다(73) 하원의원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그 해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일본계 3세다. 이듬해 부모와 함께 끌려간 그는 5살 때까지 4년을 콜로라도 수용소에서 보냈다. 7선인 그가 인권과 소수민족 권익 옹호에 열심인 것은 이런 유년의 기억 때문이다. 우리한테는 위안부 결의로 유명해졌지만 그는 특히 미국 내 무슬림들에게 관심이 많다.
■ 2001년 9ㆍ11 테러가 터지자 혼다 의원은 한달 뒤 전미무슬림연맹(AMA) 총회에 나가 "내 성(姓)은 혼다입니다. 이보다 더 일본적일 수는 없습니다"라면서 "무슬림의 정체성과 이름을 바꾸지 말라"고 했다. 진주만 사태를 이겨낸 자신처럼 무슬림도 9ㆍ11의 편견을 극복해 달라는 뜻이다. 일본 우익의 조직적인 낙선운동으로 혼다 의원이 11월 치러질 중간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할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혼다 의원이 얻은 전쟁의 교훈을 일본 정부가 깨달을 날은 언제일지.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