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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쪽빛보다 푸르게] <21> 정악의 거장 정재국씨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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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쪽빛보다 푸르게] <21> 정악의 거장 정재국씨와 아들

입력
2014.02.0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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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리 정악·대취타 인간문화재15세에 국비 장학생으로 입문칠순 넘어서도 왕성한 활동피리·대취타 아우르는 명인에● 아들 정계종씨는 아쟁 주자대학 때 해금하다군대서 아쟁으로 바꿔정악·창작·대취타 등 섭렵● 변혁의 정신도 대물림피리 산조 도전 정재국류 효시로"피리의 해석 아쟁에 이입시켜아버지 스타일 승화시키고 싶어"

윤이상의 걸작 '예악'(1967년)의 상상력을 가능케 한 것은 우리 전통음악의 최고봉인 종묘제례악이다. 가산(&#31539;山) 정재국(72ㆍ국립국악원 원로사범)씨는 이런 감각적 표현이 허용된다면, 조선 왕실이 뽑았을 법한 최고의 연주자들을 총지휘ㆍ감독하는 사람으로 공식적으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46호 피리 정악(正樂) 및 대취타 보유자'다.

대궐 연주 등 우리 전통음악의 가장 공식적인 부문에서 피리로 독주하거나, 장엄하고도 화려한 어가 행차길을 이끄는 사람이다. 가녀린 몸매로 날렵한 선을 그으며 고고하게 뭇 악기들 앞에 서는 피리처럼 그는 나이를 무색케 한다. 궁중 악대(대취타)와 궁중 제사(피리 정악)라는 최고의 공식행사가 그의 손끝에 좌우되는 셈이다.

본디 공명정대와 화평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정악은 민속악에서 최고 기량의 솔리스트를 일컫는 노름마치의 길을 원칙적으로 차단한다. 피리와 대취타 등 두 분야를 통합한 이후 그에게는 현재 이수생 120명, 전수생 40명 등 모두 160명을 헤아리는 제자들이 있다. 사재성, 김관희 등 전수 조교와 함께 이끌어 가는 피리 정악 및 대취타 보존회는 정악의 이념을 실현하는 보루다.

아쟁 주자인 아들 계종(44ㆍ국립국악원 단원, 한양대 국악과 겸임 교수)씨와 함께 국립국악원의 널찍한 연습실에 의관을 정제하고 악기와 함께 한 부자는 장중하게 '경풍년'을 합주해 나갔다. 궁중 잔치마당 중 임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음악인 '거상악(擧床樂)'의 한 대목이다.

"칠순 넘어서도 정악계, 민속악계가 모두 인정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이시다." 아들은 덧붙인다. "나도 그렇게는 못할 것"이라고. 아버지에게서 아들은 어떤 위대함마저 느낀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답은 어떨까? "내가 국악으로 이름 날리고 교수로 간 것도 다 국악계에 보탬이 되라는 뜻이라 믿는다." 기자는 공명정대의 현현을 본 것일까. "칠순 넘어서도 피리 분 사람은 내가 역사상 처음"이라는 자신감이 든든히 받쳐주는 행로다.

온 몸의 기운을 모아 조그마한 취구에 불어넣어야 하는 피리는 연주자의 건강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한 달만 안 불어도, 건강 나빠져도 소리가 아예 안 나온다는 것을 부친은 경험적으로 너무나 잘 안다. 지난해 7월 사당동에서 과천으로 이사 온 이래로 관악산 등산을 비롯해 걷기, 근력 운동과 함께 사우나까지 매일 2시간 가까이 운동을 하고 있다. "고3 이후로 핀 담배를 끊은 지 10년인데, 최근 폐활량 검사 결과 40대로 나왔어요."

시류나 인심의 변화와는 아예 담 쌓은 음악인 정악은 근본을 일깨워 준다. 원래 민속악은 잘만 하면 튀어 스타가 되지만 정악은 합주 음악이다. 운명적으로 감정 혹은 자기류의 표현을 절제해야 하는 것이다. 튀어 보이고 싶어하는 요즘 감성과는 공존하기 힘들다.

세상이 그만큼 격변했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으나 군대는 부자에게 천양지차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선 계종씨는 대학 때 해금을 하다 군에서 아쟁으로 바꿨다. 국방부 군악대 12기로 아쟁을 통해 정악, 창작 음악, 궁중 음악(대취타)이라는 3대 장르를 섭렵했다.

한편 아버지에게 군대는 다양한 세상을 제공한 계기였다. 군 예대(군 연예 부대)에 지원해 화천 전방사단 군악병으로 배속된 그에게는 코미디언 이주일, 대금주자 이생강 등 훗날 인기 가도를 밟게 되는 사병들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다가왔다. 정악 주자로서 그는 악보 보는 법을 가르쳤고, 그들은 가요를 멋들어지게 부르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니 나름 윈윈 게임. 당시 사회를 멋들어지게 보던 이주일씨는 그를 소개할 때마다 "피리의 왕자"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무조건 신나는 음악이어야만 했으니 팝송도 마다 않았고, 가요를 재즈풍으로 연주했다. 아들도 못 해 본 엔터테이너로서의 짧은 경험이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지만 가난이 덤으로 준 기회였다. 가정 형편상 진학이 힘들었던 아버지는 초등학교 수료 후, 1956년 15세 나이로 국비 장학생 혜택이 보장돼 있었던 국립국악원 내 국악사양성소(현재 국악고의 전신)의 2기생이 된다. 국악인으로서 그의 출발점에는 30명 정원에 150명 지원이라는 치열한 경쟁을 치러낸 기억이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결코 대중적이지 못한 정악이 이렇듯 이어 오고 있는 데는 이왕직아악부가 수립한 전통을 그들이 계승했다는 점이 가장 크다. 그는 궁중 음악이라는 비대중적 국악 장르에 매진했다. 가야금의 최충웅, 남창 가곡의 김경배, 대금의 조창훈 등 인접 장르의 활동에도 참가했던 동료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오직 궁중음악의 길뿐이었다. 2기생으로서 유일한 인간문화재(1993년)였고 1기 선배들보다도 먼저 세운 기록이다.

피리가 궁중음악을 맨 앞에서 이끌었던 만큼 그는 자연히 악단의 리더였다. 원래 피리 정악의 첫 인간문화재였으나 1998년 문화재청이 대취타와 함께 통합시켰다. 쾌거 혹은 신기원이라고 해도 좋았다. 앞으로도 피리와 대취타라는 별개의 장르를 하나로 아우르는 인간 문화재는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승무와 살풀이를 하나로 통합한 이매방의 업적에 비길 만한 일이다.

정악의 세계는 흔히 접하는 민속악과 차원을 달리 한다. 공자의 제사에 쓰이는 것으로 성균관에서 연주되는 아악, '보허자'와 '낙양춘' 등 중국계의 당악, 우리나라 고유의 향악 등 세 부류로 나뉜다. 피리, 대금, 비파, 가야금(신라금), 거문고(고려금), 공후(백제금)가 향악기다.

대를 잇는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의 일부다. 아들은 소싯적부터 아버지의 음악속에서 살아 왔고 재능을 보여, 국악의 길로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중학생 때 본인이 즐겨 듣던 드보르작의 '신세계교향곡'을 얼마 안 가 다 외우는 것을 본 아버지는 해금부터 가르쳤다.

"아쟁은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부터 해금과 함께 공부했어요." 당시는 따로 전공이 없을 정도로 평가절하되던 아쟁이었으나 그는 아쟁의 남성성이 좋았다. "(내 아쟁은) 아버지의 정악적 성향이 강하다. 꿋꿋하면서도 힘있다. 농현도 짙게 한다." 정악은 사람의 마음을 편히 해줘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민속음악이 인간의 오욕칠정을 다 쏟아내는 반면 정악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꿋꿋하고 힘있고, 점잖으며 화평스럽다. 그는 "아버지의 스타일을 모방, 승화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피리의 주법을 아쟁 연주에 도입하는 실험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궁중음악은 원칙적으로 합주 음악이므로 류(類)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투철한 정악주의자인 아버지가 한 번 산조에 도전해 본 일이 있다. 1972년 명동예술극장 독주회 때 선보였던 것으로, 민속악과 창작 국악을 아우른 한국 최초의 관악기 독주회였다. 국립국악원 최고의 피리 연주자가 최초의 피리 독주곡'자진한잎'(이상규 작)을 연주했다. 선배 세대는 "용기 있다"고 입 모았다. 정재국류를 효시로 피리 산조는 박범훈류, 서용석류 등으로 이어졌다. 피리 주자이자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인 원일씨도 정재국 피리 산조를 연주한다. 그는 나아가 제자가 작곡까지 하는 데 결정적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같은 변혁의 정신은 당연히 아들에게도 이어졌다. 30대에 국악원 정악단으로 창작 음악과 접한 그는 2002년 국립국악원과 김만석의 '정선기행'을 협연하더니 2005년에는 최초의 아쟁 앙상블 '아르코'까지 만드는 기록을 세웠다.'활로 긋는다'는 뜻의 그 이름 아래 3년 동안 지원석의'현성 신화(絃聲 神話)' 등 초연곡 연주로 아쟁 실내악곡이란 새 장르 소개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40대 이후 그는 창작국악의 길을 접고 한양대 국악과를 중심으로 아쟁 정악에 몰두하고 있다. 올바르게 가르치자는 다짐과 함께 하는 길이다.

그 같은 가르침을 말없이 전한 아버지에게는 피리 연주 요청이 국립국악관현악단, KBS국악관현악단 등 여기저기서 여전히 계속된다. "피리는 5분 이상 불면 눈이 다 튀어나올 듯 하고 얼굴이 벌개지는 악기에요. 혀(reed)가 관악기 중 세계에서 가장 크죠."그걸 꽉 물고 불어야 하니 온몸이 긴장한다. 문외한이 보아도 근육의 긴장도가 고스란히 전달될 정도다. 그러나 꾸준한 자기관리 덕에 그 우렁한 연주음이 40초까지 끊어지지 않는다.

그의 휴대용 가방에는 의례와 잔치용 향(鄕)피리, 실내악에 쓰는 세(細)피리, 종묘제례악에 쓰는 당(唐)피리 등 세 가지가 항상 준비돼 있다. "활용도는 가장 많지만 제일 저렴해요. 가야금 1,100만원에 피리 10만원…." 저토록 실제적이고 강력한 악기 예찬론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것도 거장으로부터.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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