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다보스 포럼에 참석한 각국 지도자들 중 가장 화제를 모은 사람은 아마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제1차 세계대전' 발언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 등을 통해 전해진 아베 총리의 기자간담회 내용을 국내 모든 언론이 인용 보도했다. 현장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던 서구 언론들도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문제가 된 내용은 아베 발언 중 중일전쟁 발발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현재 중일의 경쟁적 관계에 따른 긴장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독일과 영국의 라이벌 관계와 비슷하다"며 "당시 두 나라는 끈끈한 교역관계였지만 1914년 전쟁의 발발을 가져온 긴장상태를 막아내지는 못했다"고 답한 대목이다. 전쟁을 피하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발언에 비판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파문이 커지자 일본은 정부 대변인까지 나서 발언 내용이 잘못 전달되었다고 해명했다. 일본 언론들도 통역이 총리가 하지 않은 설명까지 붙여 잘못 전했다고 거들었다. 국내에서는 당시 아베의 '진짜' 발언 내용이 그다지 소개되지 않은 것 같아 일본 관방장관이 설명한 그대로를 옮겨 보겠다.
'올해는 제1차 대전이 있고 100년이 되는 해다. 영국과 독일은 밀접한 경제관계였는데도 불구하고 제1차 대전으로 이어지고 말았다는 역사가 있다. 질문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중일 양국에 커다란 손실일 뿐 아니라 전 세계로서도 큰 손실일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의 경제 발전과 함께 중일 경제관계가 확대해가는 가운데 중일 간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서로 긴밀히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두 나라가 지혜를 짜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발언의 무게중심이 있었다는 관방장관의 설명까지 감안해 읽어 보면, 당초 전해진 것과 뉘앙스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문제는 아베 발언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느냐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기자간담회에서 중일전쟁 발발 가능성을 물었던 사람은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 기드온 래치먼이다. 그는 블로그에 자신이 아베에게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고 썼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아베는 그런 갈등이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며 이어서 아베의 제1차 대전 발언을 전했다. 블로그 글을 통해 짐작하건대, 래치먼에게는 아베가 100년 전의 제1차 대전과 지금의 중일관계를 과감하게 비유한 것 보다 자신의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하지 않은 점이 더 놀라웠던 듯하다.
서구 사정에 밝은 일본의 블로거들도 이런 점을 문제 삼고 있다. 아베 주변에서 말하는 대로 설사 "통역이 문제"였다 하더라도 그런 식의 발언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며 한 블로거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제1차 대전으로 심각한 피해를 본 유럽 한가운데서, 특히 그런 전쟁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국제연맹(유엔의 전신)을 설치한 스위스에서, 그것도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이었다가 탈퇴해 연맹을 사실상 붕괴시키고 다시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의, 전쟁 전 명예회복을 열심히 부르짖는 총리가, 제1차 대전 100주년이라는 민감한 시기에" 했기 때문이다. 이 블로거는 아베의 발언을 일본을 다시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자폭행위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비판했다.
수년 전 주일 미국대사 물망에도 올랐던 국제정치학자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의 주저 를 인용하는 블로거도 있다. 나이 교수는 이 책에서 고대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제1차 대전을 예로 들어 결국 전쟁을 부르는 것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지도자의)확신'이라고 말한다. 서구 언론이 이번 아베의 발언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일본 지도자의 이런 민낯을 봤다고 여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범수 국제부장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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