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참여하는 소규모 커뮤니티를 찾아간 적이 있다. 나를 반긴 후 친구는 생뚱맞게 자기소개를 했다. "여기서 나는 소리라고 해." 다음은 함께 있던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눌 차례. 한쪽은 포도, 한쪽은 바다라고 했다. 별명을 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원래 이름에는 누구 언니, 누구 선배, 누구 선생님, 하며 자꾸 뒤에 뭐를 붙이게 돼서 말이야…" 앳된 얼굴의 포도씨가 말을 이었다. "조심하려 해도 나이 따라 위계가 생겨요. 가령 열 살쯤 연상인 사람에게 누구씨, 하는 게 쉽지가 않잖아요. 비슷한 연배면 왠지 민증 까야 할 것 같고…" 친구는 작은 해프닝을 하나 들려주었다. 예전에 학교 '대선배님'이 놀러 와서 누구야, 누구 선배, 하며 원래 이름과 호칭이 한참 오가고 났더니 공간 자체가 금세 '나이에 오염'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너도 여기서는 나를 소리라고 불러 줘." 나로서는 어색해서 자꾸 웃음이 나왔지만, 한편으론 호명의 어려움을 새삼 되새겼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해간다. 어렸을 때는 한두 살 연상에게도 '언니' '오빠'가 쉽게 나왔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씨'라 하면 낮춰 부르는 것 같아 저어될 때가 많고, 선배가 아닌데 '선배'라 부르기도 뭣하고, '~선생님' 하면 그 격식이 부담스럽다. 얼굴을 맞대고서 온라인에서처럼 '님'이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정하면서도 사려 깊은 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우리말의 형식이 고파진다.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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