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아버지가 있다. 긴 유학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온 뒤부터, 부쩍 자주 그를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나는 내 생명의 시작점인 그에게 육친의 친밀함을 갖지 못했다. 1940년대생인 그는 책임감 강한 가장이었고, 지극한 효자였으나, 다정한 아비는 아니었다. 그의 세대는 자식들에게 속마음을 내비치거나 표현하는 데 서툴렀다. '밥 먹었냐? 돈은 있냐? '등의 질문으로 애정을 꾹꾹 눌러 표현했고, 나는 그 속에 담긴 절절함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살가운 어미의 보살핌에 가려 부성애는 막연히 짐작될 뿐이었다. 그는 지금의 나보다 젊어서 막내인 나를 품에 안았으니, 미혼인 나로서는 그가 한 가정을 지키려 감당했을 노력을 온전히 가늠하긴 어렵다. 분명, 스스로를 물러 세우고 가족을 보살핀 나날은 눈물겨웠으리라. 그래서인지 세상에 나와 일을 하면서, 나는 아버지를 점점 더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사랑이다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가 한창이다. 지난주에 나는 박수근의 장남 박성남과 함께 모 방송 프로그램을 촬영했다. 오랫동안 박수근 그림을 아껴 봤기에, 작품 속 모델로도 종종 등장했던 그의 아들을 직접 보는 것이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을 만나는 일처럼 설레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림을 그리는 박성남은 눈빛이 맑고 정갈했으며, 겸손함과 소박함이 몸에 밴 분이었다. 전시를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그는 "나이 들수록 아버지의 그림이 점점 더 좋아진다"고 했다. 그 말이 나는 뭉클했다. 지금에야 박수근이 한국에서 그림이 가장 비싸게 팔리는 '국민화가'지만, 그에게는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였다. 박수근은 가난한 화가로 살다가 죽었고, 생계를 힘겹게 감당해내던 어머니가 불쌍했을 그는, 집에서 그림만 그리던 아버지를 많이도 원망했을 것이다. 진행자의 아주 간단한 질문에도 대답이 상당히 길었는데, 내게 그것은 어쩐지 살아서 전하지 못한 아비에 대한 애절한 사랑 고백으로 들렸다. 무능한 가장과 위대한 화가의 머나먼 평가를 그는 어떻게 화해시켰을까. "백내장으로 눈 하나를 잃고서도 항상 아버지는 괜찮다, 괜찮다 하셨어요."
그릇이 큰 사람의 가치는 역경에서 드러난다. 가난과 질병, 세상의 몰이해 속에서도 박수근은 자기 세계를 잃지 않고 묵묵히 밀고 나간 힘이 그림에 깊이 녹아있다. 아마도 박성남은 선배 화가로서 아비의 위대함을 절감하고, 아버지 박수근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녹화를 마치며 그는 활짝 웃으며 "나이 들수록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들 해요."라고 했다. 내게 그 웃음은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아들의 행복이었다.
내 아버지도 남자다.
내게는 나를 전적으로 믿고 지원해주는 아버지가 있다. 동시에, 그에게 나는 큰 근심거리이다. 어서 남들처럼 가정을 꾸리길 바라지만, 경제적으로 완전히 자립하지 못한 나는 주저하고 있다. 공부를 오래 시켜서 늦된 것 같다며 후회하셨으나, 사실 내 공부의 가장 큰 수확은 가족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해는 공감에서 시작된다. 그에게 부여된 아버지, 아들, 남편을 지우고 나서 남는 것은 건강한 중년 남자였다. 그러자, 예전엔 이해 못 했던 부분들이 자연스레 공감되었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나이를 지나자, 우연히 주어진 행운은 가족뿐이었다. 박성남의 그 자랑스러운 웃음에 물든 나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전시장을 나서며 외투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때마침 서울에는 눈이 탐스럽게 내리기 시작했다. "여긴 눈이 와서 전화 드렸습니다. (잠시 침묵) 점심은 드셨어요?" 여전히 대화는 툭툭 끊어지며 3분 이상 통화하기 어렵고, 그를 닮아서인지 질문으로 사랑을 표현하지만, 조금은 더 그와 친밀해진 기분이었다. 이번 설날엔 그동안 어머니의 고생에 가려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은혜를 잊지 말고 말씀드려야겠다. "고맙습니다. 당신의 든든한 보살핌 덕분에 저는 잘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제가 당신의 버팀목이 되겠습니다. 부디, 건강히 오래 사세요."
이동섭 예술인 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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