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나 민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이 항상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그에 걸맞은 공감대의 형성, 정의의 실현,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소통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한국 천주교회 최고 협의기구인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강우일(69ㆍ사진) 주교가 (삼인 발행)를 냈다. 강 주교는 자신의 강연과 글을 모은 이 책에서 "국가라는 것이 과연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 주교는 "3만여명이 희생된 '제주 4ㆍ3항쟁'을 국가는 그저 무장폭도가 일으킨 폭동으로 단순화시켰다"며 "국가는 언제나 신성하고 숭고하기만 한 존재인가"라고 질문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와 안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기득권의 전횡을 질타했다. "국가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사람들, 안보를 걱정한다는 사람들이 행하는 일들, 그들이 말하는 국가정책이 국민 동의나 공감대 속에서 집행되는 게 아니라 자기들만 위한 경우가 많습니다. 편향된 사고와 이념, 기득권을 위해 국가의 이름을 내거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국가가 하는 일이라고 훼손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소박한 생각이 아닐까요."
강 주교는 교회의 역할과 관련해 "교회가 오늘의 세상에 기쁜 소식을 선포하려면, 세상이 오늘 어떤 멍에를 짊어지고 있는지, 어떤 덫에 걸려 신음하는지, 또 어떤 아픔과 슬픔에 시달리는지 예민하게 공감하고 동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를 위해서는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모두 예배 위주의 관행적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우리와 무관한 것으로 흘려 보내지 말고 복음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성찰하고 회심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주교는 조류인플루엔자(AI)와 구제역 사태에 관해 "우리의 지나친 육류 식욕과 가축을 생산품으로 만들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축산업계의 상업적 욕심이 이런 비극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제사 때나 명절 때 드물게 고기 맛을 봤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시로 육류를 포식하는 현재 식생활 구조 자체를 진지하게 재고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북한 문제와 관련, 그는 "북한은 주체사상 때문에 경제가 완전히 무너져 궁핍한 상황에 처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북한은 현대 민주주의 질서를 전혀 경험하지 못해 자신들의 요구를 폭력적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며 "오랫동안 고립돼 살아온 북한 주민들을 대하려면 많은 인내와 이해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에 앞장서면서 '진보 가톨릭의 아이콘'이 된 강 주교는 2002년 10월 제주교구장에 올랐고 2008년 10월부터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맡고 있다. 2012년 한 주간지 조사에서는 '천주교계 전문가가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인물' 3위에 올랐다. 1위가 고 김수환 추기경, 2위가 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생존 인사 중 교계 전문가가 만나고 싶은 인물 1위인 셈이다. 교황이라는 말이 임금이나 황제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교종(敎宗)이라고 부르는 강 주교의 서민적 이미지가 어필하고 있다는 증거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