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황소'는 종이 위에 그린 유화다. 유채와 흔히 짝지어지는 캔버스 대신 종이를 택한 이유는 새로운 재료를 시험하려는 창작욕보다 가난 때문이었다. 1940~50년대 활동했던 수많은 천재 화가가 그렇듯 이중섭도 평생 생활고에 시달렸다. 캔버스는커녕 제대로 된 종이 살 돈도 없어 담뱃갑 안에 있는 은박지를 펴서 그림을 그렸다. 일제 강점기, 해방,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시도 맘 편할 날이 없었던 당대의 예술가에게 종이는, 주체할 길 없이 솟아오르는 영감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는 친근한 벗이었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는 새해 첫 전시로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전을 2월 5일부터 연다. 이중섭, 이인성, 박수근, 김환기, 천경자, 이응노, 이우환, 박서보 등 한국 근ㆍ현대 대표 작가 30인의 종이 작업만 모은 전시다. 종이에 그린 그림이 캔버스 작품보다 낮게 평가되는 인식을 뒤집고, 독자적 장르로서 종이 작품이 가지는 예술적 가치를 조명하고자 했다.
캔버스 위에 두껍게 칠한 유화로 유명한 박수근은 생전에 가난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화가다. 그가 자신의 후원자인 미국의 마거릿 밀러 여사에게 그림 값 대신 물감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쓴 일화는 유명하다. 물감이 다 떨어졌을 때 화가는 아마도 종이와 연필을 집었으리라. 전시작 중 하나인 '군상'은 종이 위에 연필로 선을 그리고 수채물감으로 옅게 채색한 그림이다. 두터운 물감층을 걷어낸 자리에는 따뜻하고 수더분했던 작가의 내면이 맨 얼굴처럼 말갛게 드러나 있다.
예술가들이 종이를 택한 것은 경제적 이유만은 아니었다. 조각가들은 본격적으로 재료와 마주하기 전에 종이 작업을 통해 영감을 정리하고 발전시켰다. 근대조각의 선구자인 김종영이 종이 위에 펜으로 휘갈겨 그린 자화상과 인체 드로잉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선묘력을 지녔는지 짐작하게 한다. 김환기는 훗날 '김환기 예술세계의 완성'이라고 평가 받은 점선면의 추상화를 확립하기 전 마치 일기를 쓰듯이 매일 종이 위에 점을 찍으며 번짐 효과를 연구했다.
구겨지고, 물에 젖고, 찢어지는 종이의 물성이 그대로 작품 주제가 되기도 했다. 박서보의 'ECRITURE(묘법)'시리즈는 물감을 흠뻑 머금은 한지를 캔버스에 겹겹이 붙인 뒤 마르기 전에 자나 연필로 수없이 그어 밭고랑 같은 요철을 만들어낸 작품이다. 작가가 평생 추구해온 한국적 미니멀리즘이 젖고, 뭉치고, 다시 바삭하게 마르는 한지의 특성을 활용해 새로운 형태로 구현됐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는 "종이는 예술가의 내공을 그대로 보여주는 질료"라며 "시인이 산문을 썼을 때 미처 몰랐던 내공이 드러나는 것처럼 종이 작품에서는 작가의 기본기와 예술적 고뇌, 조형적 시험 등이 잘 느껴진다"고 말했다. 전시는 3월 9일까지 신관과 본관 전체에서 열린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