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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6.5°/1월 28일] "부는 곧 빚이다"

입력
2014.01.27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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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만에 정문술이라는 이름을 다시 들었다. 그가 최근 카이스트에 두 번째로 215억원을 기부해 화제가 됐다. 2001년 개인으로는 가장 많은 300억원을 기부한 적이 있어 이번까지 총 515억원을 카이스트에 전달했다.

10여년 전 취재 현장에서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는 그는 늘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었다. 인터넷기업들이 각광 받던 닷컴 열풍이 막바지로 치닫던 2000년, 미래산업 대표로 있던 그는 소프트포럼 라이코스코리아 사이버뱅크 코리아인터넷홀딩스 등 10여개 벤처기업을 잇따라 세우거나 인수했다. 20,30대 청년들의 꿈인 벤처기업을 당시 63세 노인이 줄줄이 만든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카랑카랑한 쇳소리로 "모험은 시장에서만 하는게 아니다. 기업도 내부에서 모험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그의 설명인즉, 자원이 없는 우리는 인재를 키워야 하는데 그런 여건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니 뜻있는 기업이라도 젊은이들이 상상력과 기술을 펼칠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어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직원들이 직장을 놀이터로 여길 수 있도록 자유와 방임을 경영 모토로 삼고 있다.

말은 쉽지만 현실에서 그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이듬해 그는 또다시 기자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대표를 겸하던 벤처기업들은 물론이고 힘들여 키운 미래산업에서 전격 은퇴를 발표한 것이다. 회사가 어렵지도 않았다. 미래산업은 2000년 1,40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미국 증시인 나스닥에도 상장했다. 왜 그랬는지, 전화를 해봤다. 그는 여전히 변함없는 쇳소리로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기로 한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라며 "재산도 사회 환원하겠다"고 했다.

그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배경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그는 사실 1985년 이후의 삶은 세상에 진 빚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군 제대 후 중앙정보부에 특채됐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가 득세하며 쫓겨난 뒤 여러가지 일을 하다가 1983년 미래산업을 설립했다. 제법 돈을 잘 벌어서 1985년 전재산을 끌어모아 18억원을 새로운 기술개발에 투자했으나 실패해 몽땅 날렸다. 세상을 잃었다는 생각에 가족까지 데리고 동반자살까지 꾀했다. 하지만 '막바지 순간에 최고를 시도하다가 실패했으니 수준을 한 단계만 낮추면 성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를 죽음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그는 은퇴한 그 해 카이스트에 300억원을 기부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국내 대학에 없는 최첨단 특수학과를 만들어 달라."그래서 카이스트는 뇌 인지학과를 신설했고, 캠퍼스 한 켠에 정문술관을 만들었다. 이번에도 그는 기부를 하며 똑 같은 주문을 했다. 뇌 인지과학에 써달라고.

왜 국내 대학에 없는 특수학과일까. 그는 "기업을 하면서 고질적인 연고주의 때문에 힘들었다"면서 "학연 지연 혈연을 따지는 폐단을 나부터 끊고 싶어 연고가 없는 특수학과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출발했지만 꾸준히 그의 궤적을 지켜보니 '늘 한결같다'는 생각이 든다. 좋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볼 만큼 힘든 시절도 겪었던 그에게 '부'는 곧 '빚'이다. 그렇기에 '기부하면 보상을 바라지도 말고, 얼른 잊으라'는 탈무드의 경구처럼 그는 2002년 정문술관 기공식과 2003년 준공식 참석을 모두 거부했다. 아예 휴대폰을 꺼버린 채 잠적했다. 유별난 고집일 수 있지만 평소 그의 생각을 보면 결코 내세울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게 그의 진심이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금액을 기부한 기업인들도 많다. 그러나 금액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중요하다. 정문술 전 카이스트 이사장의 생각을 모두에게 강요할 수 없지만 '부는 곧 빚'이라는 삶에서 깨우친 그의 철학이 행복 바이러스처럼 널리 전파되기를 기대해 본다.

최연진 산업부 차장대우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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