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발면 하나 살래도 두바이까지 대 여섯 시간 가야 해요." 다행히 두바이 거치니 살 요량으로 갖고 갔던 사발면과 커피믹스를 몽땅 내놓고 오며 얼마나 뿌듯하던지. 이후 6년, 이제와 생각하니 민망하기 짝이 없다. 공관 행사용 1년치 와인과 알코올이 금지된 나라에서 꽁꽁 숨겨두었던 행정관의 위스키까지 다 털어 마셨으니 이런 얼뜨기 셈법이 있나. 게다가 사막에서 재료 구하기도 만만치 않았을 한식 도시락 싣고 천지사방 구경한 것을 더하면 이건 분명 횡재다. 아라비아 해에서 소금물 같이 마신 정은 또 얼마나 깊던지 공항에서 눈물 콧물 짜내며 끌어안고 떨어지지 않으니 누군가 에게는 재미난 풍경이었으리라.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 서기관이 찾는다. "오만과 아부다비 공관에서 부채춤이랑 이것 저것 섞은 전통공연을 보내달래요." 세상에, 아프리카에도 현대무용을 갖고 갔었는데 여전히 부채춤 타령이라니. 부채춤? 물론 예쁘다. 하지만 '어차피 살 것이라면 최고급을, 기왕 받을 박수라면 기립으로.' 그래서 시골 곳곳에 숨었던 '할배'와 '할매'들을 세상에 내놓은 선배를 찾았다. "좋다. 부채춤에 화무도 얹자. 그리고 힘은 선수(인간문화재와 명인들)한테 실으면 된다." 청신(請神), 오신(娛神), 송신(送神), "그래, 아랍 땅에 처용 불러 한판 놀고 보내자." 자, 이제 한국최고 꾼들을 모아놨으니 보고 듣는 이 누구라도 심장이 오그라들 것이다.
3개 방송국이 녹화를 요청하고 연일 인터뷰가 이어졌다. 그렇다 해도 신문 전면을 도배한 정도에서 그쳤다면 오만 공연은 가끔 꺼내볼 추억으로 접어두었어도 그만이다. 그런데 난생 처음인 공연을 리허설도 보지 않고 찍는 방송카메라가 돌아서는 춤꾼의 치마꼬리 새로 보일 듯 말 듯 들락거리는 버선발을 바싹 댕겨 잡는다. 교방춤의 이 짧은 장면이 보는 이의 애간장 녹이는 줄을 어찌 알고.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공관행사 준비는 '서로 최선을 다하지만 각기 다른 언어로 자기 얘기를 하는 과정'인 것을. 예를 들어 조명 많이 달려있으니 걱정 말고 오라는데 도착해보면 막상 불 들어오는 것은 30개 중 15개. 그런데 카메라 앵글을 봤고 다짐했다. "조명 없으면 촛불 켜자. 음악이건 춤이건 '한국 최고 선수'들이면 된다."
매년 세계 곳곳에서 수교행사를 비롯해 재외공관 및 문화원을 주축으로 많은 행사가 열린다. 워낙 오래 했기 때문에 이제 공연에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더는 예술가들에게 봉사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와 드라마, 전시, 체험행사 등은 그렇다 치고 공연프로그램을 보면 해당지역 문화동향에 상관없이 국립단체, 난타, 비보이, 타악, 퓨전, 태권도 그리고 K팝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 메뉴, 너무 먹어 식상하지 않나?
2012년 한국문화주간 행사로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다. 한상재 인니 문인회장은 국내 한 신문 블로그를 통해 "과거 어느 때보다 고급스러운 문화행사였습니다. 단조로운 부채춤이나 사물놀이만 보아왔기 때문에 그저 그런 류의 행사라는 선입견으로 무관심했던 한인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내야 할 것 같습니다"라며 예술의 질과 다양성을 강조했다. '고급스런 문화'라 하면 "자의적 판단이 가름하는 예술의 가치를 무슨 근거로 재단하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잘 알지 않나.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는 것을 그리고 관객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지혜롭고 취향도 다양하다는 것을.
국립단체 하나 움직이기는 쉽다. 경험 많아 손 크게 안가는 단체면 더 좋다. 그러나 핵심은 이것이 좋아 저것도 보고 싶게 만드는 콘텐츠의 질이다. 당장 객석이 가득 찬다 해도 내년 혹은 그 다음에 후배들이 그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면 꼬박꼬박 세금 내는 보람이 없다. 어차피 돈 쓰는 거, 현지 문화향유성향과 지금 우리문화를 좀 더 연구하자. 그리고 여전히 우리의 맹목적 동경이 향하는 유럽을 보자. 해당지역 행사와 협력해 적은 예산으로 수월하게 성과 챙기는 한편 미소와 지갑 들고 문화제국주의 촉수를 뻗치고 있지 않은가.
김신아 아트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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