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감도 좋으시구요, 길이감도 좋으세요" "이 물건도 있으시구요" "여기 앉으실게요" "기다리실게요"
무슨 말인가. 어법이 맞지 않다. 그런데 대한민국 전역에서 사용되는, 그것도 소비자 응대교육을 정기적으로 받는 백화점과 호텔의 직원들조차 즐겨 사용하는 이 말들은 그 원산지가 어디인가.
이제 "이 물건도 있고요", "여기 앉으시겠어요?", "기다려주시겠어요?"라는 말은 일상어에서 사라지고 교과서나 표준어로만 존재할 것 같다. 말은 사용할 때 빛나는데, 비표준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사용되고 있으니, 그리고 아이들이 그것을 따라 하고 있으니 아마도 우리말의 체계가 머잖아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자장'이 '짜장'이 되는데도 몇 십 년이 걸릴 만큼 언어는 보수적이어야 하건만 나날이, 시시때때로 말이 변하고 신조어가 양산되는 지금 한국말을 제대로 배워야 하는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혼란을 겪을까 싶다.
영어 발음은 끔찍하게 중시해서 원어민 영어발음 가르치고 싶어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조기유학의 폐해를 고발하는 이야기에 속 시원해하면서도, 형편 되면 본인 자녀만큼은 조기유학을 보내고 싶은 것이 우리 부모의 마음 아닌가. 글로벌 시대에 이걸 탓하자는 게 아니다. 같이 가자는 거다. 영어발음만 중요하고 한국어 발음은 그냥 얻어지는 것으로 여겨 모국어의 발음은 함부로 하는 것쯤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한국어에도 표준어 발음이 있다. 그런데 한국어 표준어 발음을 비중 있게 여긴 적이 언제였던가. 오히려 외국어 잘하면 한국어 발음이 서툰 것쯤은 더 매력 있는 일이라고 여기지는 않는가.
영어 스펠링 틀리면 민망해하기까지 하며 다른 나라 언어를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이지만, 한글을 틀리게 쓴들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관대한 지금의 우리 언어문화. 자녀와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니까 카톡으로 자녀 수준의 글자를 치고 싶어 하는 우리 부모부터 돌아보자. 아이와 소통하는 데 표준어 쓰면 아이가 "우리 부모님이랑은 말이 안 통해" 할까봐 걱정되고, 아빠 ?엄마를 자녀의 SNS상에서 퇴출시킬까봐 걱정이 된다면… 기우다.
"네 친구 장미(장거리 미인)던데?" "짱, 울딸 진미 가미(가까운 미인)^^"
동료 교수가 초등학생 딸과 소통한다며 보낸 카톡의 일부이다. 지식인을 자부하는 사람조차 이 지경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장미는 들어봤지만, 가미는 처음이에요"라고 묻는 내게 그분은 대답한다.
"아, 네 이거요. 우리 딸하고 제가 만들었어요. 장미만 있냐. 가까운 데서 보면 '가미'네? 진짜 미인은 '진미'……. 이 말들이 우리 딸 친구들한테는 꽤 소통이 되나 봐요."
맙소사. 한글 창조가 이렇게 되고 있다니. 각 가정에서 창조되고, 아이들끼리 창조하고, 언론에서 만들어내면서 온통 준말과 신조어가 탄생되고 있으니 가히 대한민국은 언어 강국임이 분명하다. 그러면서 아이가 네 살만 되어도 '한글 떼기'를 강요하고, 예닐곱 살 먹은 아이에게 받아쓰기를 시키며 한글 받침까지 가르치는 열의는 무엇인가. 정작 부모는 준말, 받침 글자 변형한 말 등을 맘대로 사용하면서 그 어린 아이들한테는 거꾸로 된 교육을 강요하고 있다.
"엄마 여기 앉아서 기다리실게요. 아들, 다녀오세요."
부모가 아이의 롤모델이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아이에게 '경어'로 모범을 보이는 것까지야 가상한 일이지만, 문법에 맞지 않는 과한 이 경어도 거슬리긴 마찬가지다. 꼭 그래야만 할까. 어른들이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이야 바람직하다 못해 고마운 일이지만, 우리 아이들이 꼭 말장난하는 엄마?아빠를 원할까? 말은 인격이다. 그 사람을 나타내는 지표인 것이다.
아이들은 지금 인격을 형성해나가고 있고 우리 부모는 완성된 인격체이다. 완성된 인격체는 그에 맞는 완성된 언어를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보고 배울 것이 있다. 이 세상에 아이와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피터팬만 산다면 그건 혼돈의 세상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바빠도 우리 부모만큼은 호기심 어린 신조어와 준말 사용보다는 제대로 된 말을 쓰면 어떨까. 아이들은 자신들이 '바담풍'해도 어른들까지 자신들을 따라서 '바담풍'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문화는 전수되어야 하는 것. 그게 바로 각 세대의 역할이다. 어른 대접을 받고 싶다면 어른다운 말을 사용했으면 좋겠다. 동안이 대세이고, 나이가 들수록 나이를 초월한 옷을 입고 싶어 하는 '나이 융합 시대'를 살아가지만, '어른의 말'은 있어야 한다. 아이들도 제대로 된 말을 듣고 읽을 권리가 있다. 이 세상은 아이와 어른의 조화로 이뤄져야 한다. 소통을 빌미로 아이들의 말을 따라 하는 따라쟁이 어른이 아이들에게 우스갯거리로 비칠지 걱정된다.
아이들보다 나은 몇 가지를 가져야 어른을 공경하든지, 기성세대를 존중할 것이 아닌가. 이 모두를 떠나서 아이는 본받을 것이 있는 세상에서 살 권리가 있다. 말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른의 말이 아이의 말을 결정한다. 부모의 말이 세상을 결정한다.
임영주 교수
임영주 부모교육연구소 대표. 신구대학교 유아교육과 겸임교수. EBS 자문위원. 저서로는 , 등 다수가 있으며, 현재 KBS 제1라디오 에 고정출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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