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고통과 직면하는 것이 때로는 위로가 된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고통과 직면하는 것이 때로는 위로가 된다"

입력
2014.01.26 11:15
0 0

'슬픔의 갈비뼈'라는 것이 있다면, 이 시들이 뻐근하도록 압박하는 것은 바로 이것일 테다. 많은 죽음들, 그 중에서도 치명적인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겠고, 부재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삶은 도약이 아니라 회전이라는 것을, 구멍을 만들며 도는 팽이처럼 결국 또 돌아오고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동작의 발견') 이제는 우리도 안다.

나희덕(48) 시인이 일곱 번째 시집 (문학과지성사 발행)을 펴냈다. 등단 25년째를 맞는 그의, 5년 만의 새 시집이다. 2001년부터 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지내며 광주에 살고 있는 그를 만나러 가면서, 어쩐지 잘 지냈냐는 범속한 인사말은 건넬 수 없을 것 같았던 것은 "마른 풀밭에 황급히 생을 이탈한 곡선을 화인처럼" 남긴 채 "잔에 남은 붉은 포도주를 도로에 다 쏟아버"리고('그날 아침') 그의 남동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겪어낸 애도의 시간이 너무 통절했다. "새소리도 나를 일으키지 못하고, 눈부신 햇살도 유리벽을 뚫고 들어오지 못"한 채 "난파된 배처럼 가라앉는 방"('불투명한 유리벽')에 그는 한동안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도처에서 "타자의 얼굴로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부재. 끝내 시로 쓰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시가 되고 만 아픈 말들이 시집 2부에 묶였다.

"어떤 경험들은 존재의 근간을 이룸에도 결코 시가 되지 못해요. 도저히 시적 제재로 대상화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동안은 그가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그랬다. 신앙이 두터운 부모에게서 모태신앙을 갖고 태어난 그는 보육원 총무로 일했던 어머니 때문에 20여 년간 고아가 아닌 채로 고아들과 함께 자랐다. 어머니의 대의를 납득하고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을 굳게 믿었던 조숙한 소녀는, 대신, 엄마 없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지었다. 그의 남동생은 소녀 나희덕이 부모를 위해 작사ㆍ작곡한 노래를 함께 연습하고 공연했던 오누이 3중창단의 일원이었다.

"잘 놀고, 잘 웃고 있다가도 불현듯 동생의 얼굴이 들이닥쳤어요. 길에서 우연히 동생과 닮은 얼굴을 보곤 숨이 멎어 걷지도 못했던 적도 있고…." 기습하는 부재.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남진우의 표현처럼, 죽은 이와 함께 사는 삶이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쓰지 않으려고, 기어이 쓰지 않으려고 했던 동생의 죽음은 어쩔 수 없이, 저절로 시가 되었고, '이제 나는 안다, 나의 애도가 엉망이 되리라는 걸'이라는 롤랑 바르트의 속 구절처럼, 그는 그 사실이 적잖이 불편하다.

하지만 그는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수만의 말(言)들"이 돌아와 된 "한 마리 말(馬)"을 마침내 빗장을 열어 풀어보낸다. "히히히히힝, 내 안에서 말 한 마리 풀려나온다// 말의 눈동자,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가라, 가서는 돌아오지 마라/ 이 비좁은 몸으로는."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스물 셋 어린 나이에 시인이 된 그는 '식물성의 시인'이었다. 모성과 생명을 대지와 나무의 에로스적 관능과 촉각적 이미지로 노래해온 그의 시들은 포용력과 수용성을 보여주는 '여성적'시들이었고, 바로 그 이유로 여성주의 시인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너는 왜 남성들이 좋아할 만한 시를 쓰냐, 왜 남성들과 소통 가능한 제도의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지적이었죠. 그러니까 상도 많이 받고 인정 받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어요." 뜨겁고 날카로운 페미니즘의 시들이 종적을 감춘 지금, "낡은 거푸집을 헤치고 날아오르느라/ 날개가 부러진 흔적이 있다면/ 당신은 새-여자// 찢긴 지느러미를 지니고 있다면/ 당신은 물고기-여자"('들리지 않는 노래')라고 노래하는 이는 바로 그다. "여성 시인의 언어는 사이렌의 노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남편 뒤치다꺼리를 하고, 두 아이를 키우며 보낸 20여 년의 삶을 통해 육화한 것이다. "제 삶이 변화하는 만큼의 문학적 변화가 정직한 것이 아닐까" 그는 생각한다.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뿌리로부터')

그럼에도 그는 분투했다. 다시 사랑하기 위해, 다시 관계 맺기 위해. 보통의 우리에게 가장 눈물겨운 것은 이것이다. 그는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끌어안았던 태고,/ 그 저녁의 온기를 기억해"냈다."섬모와 섬모가 닿았던 감촉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에게'). 여성 노숙인이 하나뿐인 담요로 개를 감싸 품에 안은 것은 그래도 "이 온기가 남아 있는 동안은 견딜 만하다"('그러나 밤이 오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의 새 시집을 읽고 팔순을 넘긴 부친은 크게 역정을 냈다고 한다. 딸이 화사하고 희망적 시를 썼으면 했는데, 시집엔 슬픔과 고통의 언어가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힐난도 들었다. "제 모든 시의 기저에는 신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다고 항변했어요. 희망을 가지라고 부추기는 것보다 때로는 고통과 직면하는 것, 인간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위로가 되기도 하잖아요."

10여 년 전 그는 한국일보가 연재했던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지면에 시인이란 "우는 자로서의 운명"을 타고난, 남의 울음을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라고 썼다. "만물의 울음소리를 자신의 몸으로 온전히 실어낼 수 있을 때" 시인은 "가장 충실하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의 새 시집을 읽으며 독자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시인을 대신해 울어줘야 할 차례라는 것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그 슬픔의 공명이, 불경하게도, 황홀하다.

광주=글ㆍ사진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