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가 새로운 정치세력을 규합하기로 마음먹고 인재 영입을 위해 제갈량을 찾아간다. 이른바 삼고초려(三顧草廬)다. 제갈량은 두 번 거절했다가 세 번째 만남에서 정계진출을 약속하며 정국상황을 브리핑한다. 그 핵심이 이른바 정족지세(鼎足之勢)다. 솥의 다리가 세 개인 것처럼 세 개의 세력이 무게를 나누어 지탱하는 형국이 가장 안정적이라는 얘기다. 이후 약 60년 동안 위(魏) 촉(蜀) 오(吳) 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제갈량이 진단하고 제안했다는 정족지세는 당시로부터 400년쯤 전에 나왔던 거족경중(擧足輕重)이라는 말과 엮여 있다. '당신의 발을 좌우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擧足左右) 어느 쪽이 무겁고 가벼운지 드러날 것(便有輕重)'이라는 표현이다. 수평저울에 물건을 달 때 가운데 딛고 있는 발을 한쪽으로 옮기면 양측의 경중이 달라진다는 의미다.
진시황이 춘추전국시대를 통합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통일된 중국은 불과 한 세대를 지나 유방의 한(漢)나라와 항우의 초(楚)나라로 양분됐다. 팽팽하게 맞서있던 양쪽 세력의 중간에 정치인 한신이 있었다. 한신은 처음에 항우 진영에 있었다가 나중에 유방 진영으로 옮겼다. 책략가 괴철이 한신을 찾아온다. 그는 "현재의 정국은 어느 쪽도 우열을 장담할 수 없는 '거족경중'의 상황"이라면서, 한신에게 독립하여 항우 유방과 함께 '정족지세'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신은 괴철의 진언을 뿌리치고 유방 진영에 머물렀고, 다소 열세였던 한나라가 다소 우세했던 초나라를 이기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거족경중의 진단'에 더 끌렸던 때문이었다. 한나라의 2인자 자리에 올랐던 한신은 얼마 후 친위세력에 의해 숙청됐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괴철이 자신에게 "그렇지 않으면 토사구팽(兎死狗烹)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던 경고를 되뇌게 된다.
정족지세의 교훈은 기원전 200년쯤에 있었던 '초한지'와 기원후 200년쯤에 벌여졌던 '삼국지'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했다. 우선 우열이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는 양대 세력이 공존하고 있다. 한나라와 초나라가 그랬고, 위나라와 오나라가 그랬다. 그들 양대 세력은 가볍지 않은 취약점을 갖고 있다. 유방은 신분이 보잘것없었으며, 항우는 백성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조조는 한나라 적통을 승계하지 못했고, 손권은 풍족한 지방의 호족에 자족하고 있었다. 양쪽의 취약점을 메우고 싶어하는 민심은 '제3세력의 명분 쌓기'에 호재가 아닐 수 없다. 귀족 출신으로 온정을 베풀었던 한신이나 왕족으로 대업을 꿈꾸었던 유비가 그랬던 듯하다. 하지만 정족지세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 무슨 결정을 했느냐에 따라 정국은 요동쳤다.
무소속 안철수 의원이 새누리당과 맞서고 민주당을 비판하며 새정치를 들고나왔다. 일단 6ㆍ4 지방선거를 겨냥하고 있다지만 목표는 다음 대통령선거다. 그의 신당은 지역기반보다 이념과 명분을 앞세우겠다는 의지다. 우리의 정치지형은 새누리당 중심의 산업화 세력, 민주당 중심의 민주화 세력, 이도 저도 싫다는 중도세력, 세 덩어리로 대체적 진영을 형성하고 있다. 안 의원은 세 번째 덩어리를 세력화 하여 정족지세를 이루겠다는 생각이다.
안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거족경중의 위치에 있었다. 그는 발을 한 발자국 옮겨 민주당 쪽에 유리하게 저울을 기울였다지만, 그것이 마지못한 행위였음이 눈에 띄게 드러나는 바람에 오히려 저울추는 역으로 기울었다. '거족경중의 묘(妙)'가 역효과를 부른 셈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같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창당을 위한 여권인사 영입이나 지방선거를 겨냥한 야권연대 등에 마음을 뺏겨서는 안 된다. 특히 지방선거에서의 민주당과 연대는 '정치 공학'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지자체별로 유권자들이 선택할 일이며, 솥이 어느 쪽으로 기울게 될지는 여론이 결정할 문제다. 6ㆍ4 지방선거가 시작된 마당에 '초한지'나 '삼국지'를 회고하다 보니 이번엔 한신의 판단보다 제갈량의 훈수가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정병진 주임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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