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을 앓고 있던 9살 정종현군은 지난 2010년 척수와 정맥으로 주사를 맞는 정기적인 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했다. 척추 주사를 맞은 지 6시간쯤 지난 뒤 정군은 여느 때와 달리 머리와 엉덩이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중환자실로 옮겨졌지만, 끝내 정군은 사망했다. 원인은 '교차 투여'. 의료진이 척수 약이 아닌 정맥 약을 척수에 주사한 것이다. 이 실수는 몇 시간 뒤 정맥 주사약을 찾는 과정에서 파악됐다. 명백한 의료사고였다.
제2의 종현이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환자안전 및 의료질 향상에 관한 법률안'이 17일 국회에서 발의됐다. '종현이법'으로 불리는 이 법안은 보건당국과 의료기관이 환자 안전 관리 체계를 강화하도록 강제하는 법적 규정을 담고 있다. 고의나 중대 과실을 제외한 사고에 대해서는 30일 안에 자율 보고를 하면 처분을 감하거나 면제하는 등 의료인을 보호하는 내용도 눈에 띈다. 의료사고를 사전에 방지하거나 최소화하기 위한 법적 기반이 마련된다는 점에서 환자들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이미 벌어진 의료사고의 경우 여전히 적잖은 환자들이 병원의 일방적인 반응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소송까지 가기 전 환자와 의료인 간 원만한 합의를 유도하는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2012년 출범했지만, 여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환자(신청인)가 조정을 신청해도 의료인(피신청인)이 거부하면 아무 절차도 진행되지 못하는 규정 때문이다.
의료분쟁조정법에 따르면 조정 신청이 접수된 뒤 피신청인이 아무런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아도 14일이 지나면 신청은 자동으로 취소된다. 전문가들은 "조정 절차에 들어갈지 말지 결정할 권리를 일방적으로 피신청인에게만 준 건 조정법이나 중재원의 당초 취지에도 어긋난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중재원에 접수된 조정 신청 건수의 약 60%가 병원이 동의하지 않아 없던 일이 됐다.
의료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분쟁을 조정하는 기관이 국내에 30여 곳 있다. 그 중 신청인이 접수하면 자동으로 조정 절차가 개시되지 않는 곳은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유일하다. 중재원 관계자는 "중앙건설분쟁조정위원회의 경우 피신청인이 동의해야 조정이 시작됐었는데, 조정 처리 건수가 10년 넘게 60건도 채 되지 못해 최근 자동개시로 규정이 바뀌었다. 의료분쟁을 다루는 또 다른 기관인 한국소비자원 역시 자동개시"라고 설명했다.
얼굴 붉히지 말고 서로 조정해보자며 손을 내민 노력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환자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조정으로 좀더 많은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의료사고 처리에 드는 사회적 비용도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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