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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우물에서 하늘보기] <2> 사치와 사보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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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우물에서 하늘보기] <2> 사치와 사보타주

입력
2014.01.23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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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노숙 시인의 '금박 원고지' 처럼… 꿩은 못잡고 고생만 하는 이청준 소설의 '매잡이 노인'처럼…다른 삶에 대한 의지가 꿈틀대고 있기에… 저 보이지 않는 삶을 보이는 삶 속으로 끌어당기는 게 아닐까

그게 누구의 소설이었을까, 제목이 무엇이었을까, 40년도 더 전에 잡지에서 읽은 글이라서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줄거리의 일부와 어떤 장면들뿐이다. 소설가의 친구인 어떤 퇴폐 시인의 이야기다. 유미주의자인 시인은 세상의 어떤 윤리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온갖 사회적 요청을 속된 것으로 치부한다. 자주 술에 취해 있고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라도 하려는 듯 늘 기행을 일삼는다. 그가 어느 날 몸 파는 여자를 끌고 교회에 들어가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데, 지나가는 행인이 보다 못해 그의 멱살을 잡고 뺨을 갈겼다. 그 사건 이후 시인은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자기를 징벌한 그 행인에게서 신의 현신을 본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그 시인의 성벽을 묘사하는 내용에 특별하고 매혹적인 것이 있었다. 자신이 경멸하는 친구들에게 이틀이 멀다 하고 신세를 지고, 일정한 거처가 없어 노숙을 하는 날도 드물지 않은 그가 늘 최고급 원고지를 품에 안고 다녔다. 질이 좋은 종이에 금박으로 테를 두르고 역시 금자로 제 이름을 박아 넣은 그 원고지를 두고 누가 타박이라고 할라치면 그것이 바로 예술가의 긍지라고 그는 대답하곤 하였다.

스무 살 무렵 이 소설을 읽을 때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 바로 이 원고지였다. 금박의 테두리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이름자가 새겨진 원고지를 상상해 보았다. 어쩌면 그런 원고지에 글을 쓰기 위해 문학의 길에 들어선 것 같기도 한데, 끝내 이름자가 새겨진 원고지를 갖지는 못했다. 원고지를 맞춘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학원 시절 친구들과 함께 특별히 공들여 도안한 원고지를 인쇄소에 주문하여 라면상자 한 개 분량을 내 몫으로 받았으나, 삼분지일도 쓰기 전에 컴퓨터 세상이 왔다. 이제는 원고지에 글을 쓰지 않는다. 이름이 알려진 문인들 가운데 특별한 의지와 고집을 지닌 몇 사람을 제외하면 펜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없다. 나처럼 글씨가 졸렬한 사람에게는 잘 된 일이지만, 글씨가 지적인 연마의 흔적과 인품을 품고 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애석한 마음이 없지 않다. 몇 년 전에는 문인들의 육필전이 열린다고 해서 가보았더니, 그것은 마치 우리가 '글씨를 못 쓰게 된 역사전시회'를 보는 것 같았다. 작고한 작가들은 글씨를 잘 썼고 생존 작가들은 서툴렀다. 원로 문인들의 글씨는 아름답고, 어떤 젊은 작가들의 글씨는 글씨라고 말하기도 민망했다. 문인들에게 서예가의 기량을 바랄 것은 물론 아니다. 누가 글씨를 잘 쓴다고 말하면, "내가 글씨를 잘 쓴다고요?" 이렇게 물으며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의 숙련된 글씨는 몸의 감각과 일체를 이룬 깊은 지식을 느끼게 하고,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상상력에도 박자를 만든다. 저 소설 속의 퇴폐파 시인도 그런 글씨가 맥박을 치며 손가락 끝으로 쏟아져 나와 그 오만한 원고지 위에서 제 육체의 리듬과 천지자연의 리듬이 하나로 합해져 사치스럽고 게으른 낙원 하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유미적이거나 퇴폐적인 예술이 아니더라도, 예술을 예술 되게 하는 기본 요소에서는 사치가 크게 한 몫을 한다. 지극히 사실적인 그림에도 균형 잡힌 구도가 있고 색깔의 배합이 있으며, 오페라의 가수들은 온갖 기량을 다 바쳐 가장 불편한 방법으로, 다시 말해서 가장 사치스런 방법으로 말을 한다. 시를 쓰는 시인이 감정의 사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운과 박자를 맞추기 위해 왜 그렇게 긴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시간과 노력이 모두 그에 합당한 대가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시의 까다로운 운율 장치만큼 무용한 것은 저 노숙자 시인이 원고지에 두른 금박 테두리밖에는 없을 것이다. 보들레르는 시 '여행에의 초대'에서 미학적 유토피아 하나를 구상하며, 거기서 섬세한 정신이 누려야 할 것으로 질서와 아름다움, 고요와 순결한 쾌락을 꼽고, 거기에 사치를 덧붙였다. 천지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유현한 기운이 있음을 질서와 아름다움이 알려준다. 고요는 그 기운을 관상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이며, 쾌락은 인간의 몸이 그 기운과 일치하는 데서 오는 행복감이다. 사치는 생명의 운명이 노역에서 시작하여 노역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위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일하기 위한 힘을 쌓아두려고 논다는 말을 흔히 하나 우리는 오히려 놀기 위해서 일을 한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

이제는 다른 세상 사람이 된 이청준의 소설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을 하는 데 인생을 완전히 소진하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꿩을 잡을 가망도 없이 갖은 고생을 다하여 매를 기르는 '매잡이'의 매잡이 노인이 그렇고, 줄에서 떨어져 '승천'할 때까지 줄을 타는 '줄광대'의 줄광대가 그렇다. '선학동 나그네'의 소리꾼 일가의 이야기는 더 처절하다. 늙은 소리꾼은 제 딸에게 산천이 감동할 소리를 얻어주기 위해 그 눈을 멀게 한다. 딸이 그 소리로 세상의 영예를 얻는 것도 아니다. 딸은 어느 날 어느 곳에서 노래를 불러 산을 학처럼 날게 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인생을 소진하기에 성공하는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뛰어난 알레고리이다.

그들은 단지 소설 속의 인물들일 뿐일까. 개량 한복을 입고 다니던 고향 후배가 생각난다. 예술가를 자처한 적은 없으나, 이청준의 주인공들처럼 그 몸으로 예술가의 알레고리가 된 사람이다. 그는 젊어서 글을 쓰려고 하였으나 곧 작파하고, 요가 선생이 되었지만 그 일도 오래 가지 못했다. 나이 마흔을 넘기자 고향에 내려가 노모와 함께 된장을 담가 팔았다. 제법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리는가 싶더니 그 일에 너무 열심인 것이 어쩐지 불안하다는 소식이 뒤이어 들려왔다. 재래종 콩의 종자를 구하기 위해 전라도 산간을 누비고,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 다니며 장 담그는 방법을 물어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무렵 나는 그를 만나러 고향에 내려갔다. 무슨 충고를 할 계제가 아니었다. 전통 된장의 중요성에 대한 길고 열정적인 강의를 한 차례 듣고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 노력 끝에 만든 된장은 맛이야 그저 그만한데 값이 높을 수밖에 없어 팔리지 않았다. 노모는 세상을 떠났고 그는 고향을 떠났다. 지금은 소식이 없다. 나는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자신을 무용한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는 자기에게 맞지 않는 세상에 맞서 가장 과격하고 사치스런 사보타주를 했다.

이 사보타주를 지지할 것 같은 짧은 시,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을 읽는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북치는 소년이 그렇게 북을 친다는 말일까. 김종삼을 흔히 미학주의자라고 부른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새삼스럽게 미학주의가 사실주의나 현실주의의 대척점에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싶어진다. 내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친구는 대학에 다닐 때 어느 고아원에서 자원봉사를 했는데, 미국의 자선가들이 고아들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카드의 몇 줄 사연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대개는 판에 박은 내용이지만, 한 카드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더란다. "선물을 보내고 싶지만 그게 네 손에 들어갈 것 같지 않아 그 대신 비싼 카드를 사서 보낸다." 그는 울기만 하고 이 말을 번역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아이가 누구보다도 먼저 알고 있을 현실의 가혹함을 또 다시 상기시켜 주고 싶지 않았고 자칫 하다가는 그 카드마저 아이 손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중으로 내용 없는 카드를 받았을 그 불행한 아이에게 이 내용 없음보다 더 현실인 것이 어디에 있었을까.

예술은 자주 그 무용한 사치와 그 과격한 사보타주로 현실의 억압을 비껴간다. 억압이 없는 삶은 물론 없다. 인간관계와 사회적 제도를 말하기 전에, 지극히 섬세한 물질이지만 여전히 물질인 우리의 육체가 우선 물질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저 고아원의 불행한 아이는 외국의 자선가가 한 해에 한 번 보내준 내용 없이 아름다운 카드로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생명을 부지해 준 것은 그의 선물을 가로채기도 했을 고아원 관리자들이 인색하게나마 제공해주는 밥과 옷과 잠자리였다. 그러나 억압의 저 너머를 꿈꾸지 않는 삶은 없다. 또 다른 삶에 대한 의지가 없다면 물질이 이 까다로운 생명을 왜 얻어야 했으며, 그 생명에 마음과 정신이 왜 깃들었겠는가. 예술가의, 특히 시인의 공들인 작업은 저 보이지 않는 삶을 이 보이는 삶 속으로 끌어당긴다. 그의 사치는 저 세상에서 살게 될 삶의 맛보기이다. 그 괴팍하고 처절한 작업을 무용하다 불리게 하는 것은 이 분주한 달음박질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내가 왜 사는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묻기를 두려워하는 지쳐빠진 마음이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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