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전에,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지명에 관한 글을 쓰다가 갈무리해둔 게 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긴 단어는 뭔지 그런 걸 좀 찾아서 한번 쓰는 것도 재미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자료를 뒤지고 검색하는 동안 우리말은 별로 긴 게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아무리 길어봤자 20자도 안 되겠지 뭐. 실제로 우리말은 그리 길지 않다. 가장 긴 단어가 청자양인각연당초ㆍ상감모란문은구대접(靑磁陽印刻蓮唐草·象嵌牧丹紋銀釦大楪)이라는데, 그래봐야 17자다. 그나마 일반 단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전문 용어다.
고유명사와 전문 용어를 뺀 단어 중에서는 '작고 단단한 물건이 약간씩 튀면서 잇따라 굴러 가는 모양'이라는 뜻의 북한말 '딱다그르르딱다그르르하다'와, 이것보다 느낌이 큰 '떡더그르르떡더그르르하다'가 12자로 제일 길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시계도 똑딱 똑딱 가는 게 아니라 "똑이니까니 딱이야요" 이러면서 간다니까 느리고 길 수밖에 없겠지.
긴 단어라고 하면 사람들이 맨 먼저 떠올리는 게 있다. floccinaucinipilihilification,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 뜬구름같이 여기기라는 영어 단어다. 일상에서 잘 쓰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알파벳 29자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일단 영어부터 생각하기 마련 아닌가. 몇 년 전 글을 쓸 때 나도 이게 제일 긴 단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자 신문사 선배 한 분이 전화를 걸어와 "인마, 그게 아니야."하면서 점잖게 다른 말을 알려주었다. 진폐병이라는 뜻의 Pneumonoultramicroscopicsilicovolcanoconiosis였다. 발음은 '뉴모노울트라마이크로스코픽실리코볼케이노코니오시스'가 되는 모양인데, 일일이 세기 싫어서 남들이 써놓은 걸 찾아보니 45자라고 돼 있었다. 정말 길다. 병 이름 대다가 숨넘어가 응급실에 실려 가게 생겼다.
그러면, 이게 제일 긴 영어 단어인가 싶었는데 그것도 또 아닌 모양이다.
Aequeosalinocalcalinoceraceoaluminosocupreovitriolic. 뭐라고 읽는지 모르지만 이런 단어가 있다는 것이다. 17세기 경에 에드워드 스트러더라는 화학자 겸 의사가 영국 브리스톨지방 광천수의 구성 성분을 정의한 단어로, 알파벳 52자다.
더 긴 말로는 그리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48~기원전 380 경)의 작품에 나오는 요리 이름이 있다고 한다. 알파벳 170자다. 이틀 동안 남은 음식을 모두 쏟아 부은 국을 말한다는데, 내가 40여 년 전 자취할 때 종종 만들어 먹던 '이것저것 마구 섞어 쓰레기 치워 찌개'와 비슷한 건가 보다. 이걸 적으려면 서로가 피곤하니 그냥 그런 게 있다고 하자. Aop로 시작해서 pha로 끝나는 단어인데, 이것저것 마구 섞는 요리가 17가지나 된다고 한다.
또 바이러스로 인해 발생하는 무슨 병 이름 중에 1,185자나 되는 게 있고, 트리프트판 신세타아제 A단백질(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의 과학명으로, 267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되는 효소를 가리키는 말에 1,909자나 되는 게 또 있다고 한다. 이것도 그냥 그렇다고 해두자.
그러면 이걸로 게임이 끝난 건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잇고 붙이고 얹고 보태서 얼마든지 긴 단어를 만들어 내는 독일어라는 게 있지 않나? 독일어는 헝가리어나 핀란드어처럼 단어 길이가 마구 늘어난다. 우습게보면 안 된다. 볼펜의 독일어는 'Kugelschreiber'인데, '둥근 구'를 뜻하는 'Kugel'과 '글씨를 쓰다'라는 'schreiben'이 합쳐진 단어다. 이런 식의 단어가 독일어에는 무수히 많다.
합성 사례를 한번 볼까? 선장이 갖고 있는 볼펜이라면 이렇게 된다. Kapitanskugelschreiber.
그런데 이 볼펜이 도나우강에 다니는 증기선 여행사 선장의 것이라면? Donaudampfschiffahrtsgesellschaftskapitanskugelschreiber.
그 볼펜에 사용되는 잉크까지 이야기하려면 다섯 자를 더 붙여야 한다.
Donaudampfschiffahrtsgesellschaftskapitanskugelschreibertinte.
그런 잉크를 다루는 상점을 말하려면
Donaudampfschiffahrtsgesellschaftskapitanskugelschreibertintenfachgeschaft.
그런 잉크를 다루는 상점의 매니저를 가리키는 말은 이렇게 될 수 있다.
Donaudampfschiffahrtsgesellschaftskapitanskugelschreibertintenfachgeschaftsfuhrer. 그러면 그 상점의, 그 매니저의 가족을 말하려면 어떻게 되나? 매니저의 가족 중에서도 부인의 50회 생일을 말하려면 또 몇 자를 덕지덕지 붙여야 되는 건가? 독일어는 이렇게 대단하고 무지막지한 언어다.
그러나 영어의 옥스퍼드사전 격인 독일 두덴사전에 올라 있는 가장 긴 단어는 67자였다. Grundstucksverkehrsgenehmigungszustandigkeitsubertragungsverordnung. 부지교류허가권한 이양규정이라는 법규 이름인데, 광우병 검역법안으로 1999년에 제정됐다가 유럽연합의 규제법안 개정에 따라 독일에서 가장 긴 단어가 사라졌다고 작년에 독일 통신사 dpa가 보도한 바 있다. 이제 공식적으로 가장 긴 독耉?단어는 36자인 KraftfahrzeugHaftpflichtversicherung. 자동차손해배상책임보험이다.
긴 단어를 따지다 보니 쓰면서도 질린다. 한마디만 더 하고 끝내자. 중학교 때 본 영어 참고서에 이런 말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긴 단어는? 그건 smiles다. smile의 3인칭 단수 동사가 아니라 smile의 복수 명사를 말한다. 아니 동사라고 해도 상관없다. 좌우간 s와 s 사이가 1마일(1.6km)이나 되니 길지 않아? 어때, 내 말 맞지? 그런 이야기였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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