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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1월 23일] 새벽에 걸려 오는 전화

입력
2014.01.2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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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전화가 걸려왔다. 무심코 발신번호를 보았다. 일반전화번호였다.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는 대부분 술 취한 사람들이 거는 것이다. 전화를 받으면 몇 십 분에서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박자를 맞춰줘야 한다. 떠들썩한 술자리 소음이 들려오고 맨정신으로 술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 곤욕을 치러야 한다.

급한 일이 아닐까 싶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술에 취한 A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디냐. 어서 와라. 보고 싶다. 통화내용은 간단명료했다. 바로 발신 통화버튼을 눌렀다. 착신이 불가능한 전화번호였다. 핸드폰 배터리가 방전되었거나 또 핸드폰을 분실했거나 안 받을까 싶어 공중전화로 한 것이다. 한참 만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대뜸 출발했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었으니 빨리 오라고 했다. 거기가 어디냐 물었는데 어딘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추워 죽겠으니 빨리 오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동전도 없다. 어디서 점퍼를 벗어놓고 나와 추워 죽겠다. 어딘지 물어보고 다시 전화하라고 말했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또 전화가 끊겼다.

다시 전화가 걸려오기만을 기다렸다. 동전이 떨어져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상상을 했다. 그는 그런 주변머리도 없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는 대신 길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찾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었다. 집에 내려갈 차비가 없으니 계좌로 부쳐줬으면 좋겠다고. 그는 공중전화에 남은 70원으로 계좌번호를 불러주었다. 한참 만에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갑을 잃어버려 가방에 통장만 남았다. 은행에 가서 통장을 찍어봤는데 원고료 들어온 게 없었다. 통장에 인쇄되는 소리가 나서 원고료 들어온 줄 알았는데 '생일 축하합니다.'가 찍혀 있었다.

다시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수신자부담전화로 걸면 되는데 그는 술에 취해 있었고 나는 수신자부담전화를 떠올리지 못했다. 어딘지도 모르는 거리를 헤매고 있을 그를 생각했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여기가 어디냐 물어볼 숫기도 없는 그였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전원이 꺼져 있었다. 엄동설한의 거리를 헤매는 그에게 찾아갈 방법이 없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 떠올랐다. 집 근처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집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도 되지 않았다. 무슨 생각엔가 꽂혀 골목을 잘못 들어선 것뿐인데 방향감각을 잃고 말았다. 나는 추리닝바람으로 낯선 도시의 골목길을 헤매고 있었다. 덜덜 떨면서 단독주택의 초인종을 누르고 옷과 이불을 빌려 달라 말하고 싶었지만 대부분 묵묵부답이었다. 인터폰을 받은 사람도 취객의 장난쯤으로 알았다. 달도 별도 없는 하늘엔 십자가 불빛만이 널려 있었다.

점심 무렵이 되어 그와 통화가 되었다. 새벽에 잘 들어갔느냐 묻고 싶었지만 능청스럽게 근황을 물어보았다. 그는 자신이 새벽에 전화한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의 핸드폰에는 수신번호가 찍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간신히 숙취를 수습하고 일어난 아침, 핸드폰 발신번호를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술을 마시고 전화를 걸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별의별 상상을 하게 된다. 멀쩡한 상태로 전화를 받은 상대방한테 미안해지고 나를 들켜버린 자괴감에 빠져 하루 종일 허우적거리게 된다.

그래도 악마의 유혹에 빠지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무장해제 된 상태로 전화를 걸어도 될 상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전화를 걸 용기도 남아있지 않다. 술 담배를 끊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폭음하면 몸이 부대껴 견딜 수 없는 나이가 된 것이다. 맑은 정신으로 사는 것도 좋지만, 새벽까지 술을 마시는 여유가 사라진 게 못내 씁쓸하다. 어둡고 추운 거리에서 혼자된 사람이 걸어오는 전화를 받고 싶다.

이윤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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