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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비 외모로 뽑았을까? "얌전하고 착한 게 1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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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비 외모로 뽑았을까? "얌전하고 착한 게 1순위"

입력
2014.01.2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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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후와 후궁은 임금 한 분만 바라보며 사는 구중궁궐의 외로운 여인으로 그려진다. 그들의 진짜 삶은 어땠을까. 국립고궁박물관이 최근 이라는 학술연구용역 보고서를 펴냈다. 보고서는 조선왕실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이면서 유교적 여성문화를 대표하는 왕비와 후궁을 집중 조명했다.

조선시대 왕에게는 철저한 '일부일처제'가 적용됐다. 물론 중전은 한 명이지만 후궁(내관)은 여럿을 두어도 무방했다. 태조가 19명, 광해군이 15명, 성종이 13명의 후궁을 뒀고, 단종도 후궁이 2명이나 됐다. 후궁으로는 정1품인 빈(嬪)을 비롯해 귀인(貴人ㆍ정1품) 소의(昭儀ㆍ정2품) 숙의(淑儀ㆍ정2품) 소용(昭容ㆍ정3품) 숙용(淑容ㆍ정3품) 소원(昭媛ㆍ정4품) 숙원(淑媛ㆍ정4품) 등 8품계가 있었다.

조선 임금은 태조부터 순종까지 모두 27명. 왕비는 계비를 포함해 45명이며, 후궁 숫자는 왕비의 3배에 이르는 130명 정도였다. 왕비는 양반의 여식이지만 후궁은 양반은 물론 중인, 노비, 과부까지 신분이 다양했다. 선조 조모인 창빈 안씨는 정현대비 시녀로 있다 중종의 성은을 입고 승격했다. 태종은 과부 2명을 후궁으로 삼았고 철종 후궁 12명은 모두 궁녀 출신이었다.

왕비는 왕통의 후계자를 낳았기에 수렴청정으로 정치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섭정한 왕비는 세조비, 정희왕후, 중종비 문정왕후, 명종비 인순왕후, 영조비 정순왕후, 순조비 순원왕후, 익종비 신정왕후 등 모두 6명이었다.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의 수장인 왕비를 뽑는 기준은 "얌전하고 착한 것이 제일"이었다. 중종 1년(1506년) 정현대비(성종비)는 단경왕후를 폐위한 뒤 새 중전을 간택하면서 이 같은 기준을 제시했다. 이렇게 뽑힌 장경왕후는 8년 뒤 인종을 낳다가 별세한다.

왕비와 후궁들의 궁궐 내 삶은 고단했다. 대왕대비, 왕대비, 대비, 중전, 세자빈, 후궁 등 순으로 이어지는 엄격한 상하 위계질서 속에서 왕과 왕실 어른에 대한 순종과 인내라는 유교적 덕목을 종신토록 지켜야 했다. 처소별로 30~100명 정도의 궁녀가 배속됐지만 그들은 입궁 때 사가에서 몸종, 유모 등 사노비인 본방나인을 데려왔다. 왕비가 유일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였다.

궁에 한 번 들어오면 죽어서야 나갈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바깥 구경을 전혀 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영창대군 생모인 인목대비는 인왕산 아래 초정으로 자주 행차했다. 세종의 왕비 소현왕후는 온양온천에 다녀오기 위해 100여 명을 대동하고 한 달간 행차했다.

왕의 여자들의 목표는 왕자를 생산하는 것이다. 대통 승계가 중요했던 만큼 왕비나 후궁들의 임신과 출산은 왕실의 최대 경사였다. 왕비들은 임신 7개월에 이르면 궁에는 산실청이 설치됐다. 출산을 주관하는 권초관은 정2품 이상 관직자 중에서 선발될 정도로 출산에 국가적인 관심이 쏟아졌다. 하지만 출산 이후 육아에서는 왕비 역할이 그리 크지 않았다. 조선시대 왕 27명 가운데 적장자(嫡長子)로 왕위에 오른 왕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 7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서자 출신이었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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