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후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불리는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백사마을. 사람이 살까 싶은 움막에서 김숙희(54)씨를 만났다. 파라솔을 중심으로 1.5m 높이의 스티로폼 대여섯 장을 세운 뒤 비닐을 둘러친 한 평(3.3㎡) 남짓한 움막이 그와 남편 한모(57)씨, 자식 같이 돌보고 있는 개 일곱 마리가 함께 추위를 피해온 공간이다. 지난 한 달간 비좁은 움막 안에서 부부는 차마 눕지 못한 채 앉아서 잠을 자고 밥을 지어 먹었다.
엄동설한에 왜 이들 부부는 움막 생활을 시작했을까. 사연은 이렇다. 지난달 19일 새벽 폐지를 주워 근근이 살아가던 이들 부부의 단층집 작은 방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다. 부부는 다행히 빠져 나왔지만 방 안에서 잠을 자던 개 여섯 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는 집과 함께 잿더미로 변했다. 동네를 떠돌던 버려진 개와 고양이들이었다. 부부는 하루아침에 살림살이와 애지중지 키우던 개와 고양이를 잃었다.
불이 난 뒤 구청과 주민센터에선 인근 고시원이나 여관 등 임시 거처로 옮기라고 권유했지만 부부는 차마 이 곳을 떠날 수 없었다. 군데군데 불에 그을린 자국이 선명한 스웨터 차림의 김씨는 "여기서 얼어 죽더라도 죽은 내 새끼들과 살아남은 내 새끼들이 있는 이 곳을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부부는 화재 후 며칠간은 재만 남은 집터에 텐트를 치고 살았다. 살이 에일 듯한 추위는 핫팩으로 견뎌냈다. 부부는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새벽 내내 폐지를 모아 개들의 먹이를 마련해 먹였다.
얼마 후 이들의 이야기가 유기견 관련 온라인 카페에 알려지면서 하루에도 열댓 명씩 자원봉사자들이 몰려왔다. 지난 한 달간 80여명이 찾아와 화재현장을 정리하고 개들을 돌봤다. 쌀 라면 이불 휴지는 물론 개들이 먹을 사료까지 후원이 이어졌다. 스티로폼 움막도 이들의 작품이다. 김씨는 "텐트에 비하면 지금은 궁궐"이라며 웃어 보였지만 움막 안에 설치한 연탄난로 위로 스티로폼이라도 쓰러진다면 또다시 화마에 휩싸일 수 있는 상황이다.
김씨 부부는 남은 개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 앞으로도 이 동네를 떠나지 않을 생각이다. 집터에 허름하게라도 집을 지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백사마을은 2009년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돼 건물 신축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재개발구역 특성 상 빈집이 많지만 집 주인의 동의 없이 들어가 살 수도 없다. 부부는 인근 빈집에서 추위라도 피하다가 집 주인이 나타나면 도움을 구해보겠다며 주민센터에 사정했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다.
주민센터 관계자는 "빈집이라고 해도 엄연한 사유재산인데 관공서에서 마음대로 들어가라고 할 수는 없다"면서 "상황은 안타깝지만 관내 유기견들과 함께 지낼만한 공간을 마련하기가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조아름기자 archo1206@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