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얀마의 한국 봉제업체 A사에서 일하는 여성 S씨는 하루 12시간 일하는 동안 휴식시간이 점심시간 빼고 고작 20분이다. 700명이 일하는 공장에 화장실이 20개뿐이라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오기도 쉽지 않다. 근무 중 화장실에 가려면 관리자에게 확인을 받아야 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면 월급을 깎는다.
#2 필리핀의 한국 조선업체 B사에서 근무하는 E씨는 숙련된 기술자이지만 몇 년째 화장실 청소나 벌초, 녹 제거 같은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 한국인 관리자는 "네가 노조 활동을 했으니 여기에서 일해야 한다"고 했다. 급기야 얼마 전에는 남들이 꺼리는 하수구 청소까지 하게 됐다.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파업을 정부군이 유혈진압한 배경에 한국 기업이 있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구체적인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해외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의 횡포가 예외적인 것은 아니라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20일 국가인권위원회 의뢰로 공익법센터 '어필'이 수행한 '해외 진출 한국기업의 인권침해 실태조사 및 법령제도 개선방안 연구' 보고서는 개발도상국에서 한국기업이 저지르는 인권침해 내용을 고발했다. 지난 10여년간 57개국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에 대한 문헌분석과, 필리핀 미얀마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해 조사한 결과다.
보고서에 따르면 필리핀에 진출한 한 한국기업은 위험한 화학물질을 다루는 노동자들에게 별도의 안전장비를 제공하지 않거나 성능이 떨어지는 장비를 줘 노동자 안전을 외면했다. 중장비를 사용하는 한 건설사는 필리핀 노동법이 규정하는 의료시설을 갖추지 않았다. 일정 기간을 근무한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다른 하청업체로 옮기는 식으로 정규직 전환을 막거나 경력과 무관하게 최저임금만 주는 회사도 적지 않았다.
미얀마에서는 국제사회가 막고 있는 아동 노동이 자행되고 있었으며, 하루 13~16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고 휴식시간을 보장하지 않는 등 노동 환경이 매우 열악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 한국기업은 토지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적정 보상액의 5분의 1만 주고 주민을 몰아내 생존권을 위협하기도 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에 간 연구진은 한국 공기업이 하청업체를 통해 아동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목화 농장에서 강제 노동을 시킨 사례를 확인했다. 문제가 된 공기업은 아동은 물론 성인에 대한 강제 노동도 전혀 없다며 부인했다.
연구진은 해외 진출 한국기업들이 ▦인권의식이 부족하고 ▦주민들과의 협상을 회피하며 ▦부패한 현지 공무원들과 결탁해 이런 인권침해를 저지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1970~80년대 한국에서 일삼던 부당 노동행위의 무대를 해외로 옮긴 셈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현지 공관이나 한국무역투자진흥공사 등이 업체의 부당한 관행을 개선하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을 또 다른 원인으로 지적했다.
연구책임자인 김종철 어필 상근변호사는 "아직도 '기업이 인권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생각하는 한국기업이 많은 듯하다"며 "기업은 인권규범을 제대로 시행하고 정부도 기업이 인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계도하는 제도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2월 초 전문가와 시민단체들이 참여하는 개선방안 토론회를 열 계획이다.
안아람기자 onesh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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