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 18일 새벽 임진강 고랑포.
서치라이트가 지나가자 바위처럼 꼼짝 않던 군복 차림의 사내들이 얼음에 바짝 엎드린 채 순식간에 강을 건넜다.
"동이 트기 전까지 법원리로 이동한다." 선두에 선 대장이 짧게 지시하자 31명의 대원은 긴장된 표정으로 배낭을 둘러맸다. 이들은 서울 기습을 목표로 창설된 북한 민족보위성 소속 124군 무장공작원들이었다.
사리원의 인민위원회 청사에서 청와대를 모델로 예행연습을 마친 그들은 각자 AK소총 1정에 실탄 300발, 그리고 TT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했다. 예리한 대검까지 허리춤에 꽂은 부대원들은 D데이를 21일 20시로 잡고 강행군을 시작했다.
19일, 파주 법원리 야산에 집결한 공작원들은 돌발사건에 직면했다. 전열을 갖춰 출발하려는 그들 앞에 땔감을 구하러 산에 오른 민간인들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26사단 마크가 붙은 국군복으로 위장했지만, 나무꾼들은 검은색 운동화와 AK소총을 보고 무장공비임을 직감했다. 권총을 꺼내 든 대장은 이들을 죽일 경우 시신 처리 문제를 고민하다 결국 즉석 투표를 통해 이들을 풀어줬다. 임무 실패의 결정적 계기였다.
나무꾼 형제들은 산에서 내려온 즉시 경찰에 신고했고 군경은 비상이 걸렸다. 다음날 오전 서울에 갑호 비상령이 발동됐고, 김성은 국방장관이 보고를 위해 청와대로 달려갈 때쯤 124군 부대원들은 완전무장을 한 채 노고산과 진관사를 거쳐 북한산 비봉에 올라 있었다. 검문 한 번 받지 않은 채 시속 10km 속도로 이곳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북악산이 아니구먼…" 낭패한 표정의 대장이 서울 시내를 굽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하루 쉬고 내일 저녁 청와대로 직공 한다"
운명의 21일이 왔다. 124군 부대원들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특무대 복장으로 위장한 후 거침없이 세검정 도로로 들어섰다. 부대원들이 자하문에 이르자 종로경찰서 소속 정종수, 박태안 형사가 이들을 막아섰다. 방첩대라고 둘러댔지만, 이번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지프 한 대가 달려오고 최규식 종로서장까지 가세해 이들을 저지하자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말다툼을 벌이던 중 다급한 유격대가 총을 쏘기 시작했다. 최서장과 정순경이 쓰러지고 주위는 삽시간에 전쟁터로 변했다.
청와대 돌격은 이미 지상과제가 아니었다. 부대원들은 폭사하거나 북악산, 인왕산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습격2조 조장을 맡은 김신조 소위도 세검정 바위틈에서 자폭용 수류탄을 손에 든 채 양손을 들고 투항했다.
공포의 밤이 지난 22일 아침,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가 내뱉은 말은 전 국민을 경악시켰다. "청와대 까고 박정희 목 따러 왔시요!"
북한군 31명 중 김신조는 생포되고 28명은 사망, 2명은 월북했다. 2000년 9월 북한 김용순 노동당비서와 함께 송이버섯을 들고 청와대를 찾았던 박재경 대장이 당시 생존대원 중 하나로 알려졌으며, 투항한 김신조는 귀순 후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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