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大寒)인 어제는 추위 대신 눈이 왔다. 서울 동쪽 끝에서 점심을 먹는 도중이었다. 아침부터의 회색 하늘이 엷은 커피 색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함박눈이 쏟아졌다. 갈대와 왕버들이 드문드문 박힌 둔치와 그 옆을 느리게 흐르는 한강이 한 순간 시야에게 사라졌다. 젖은 공기를 빨아들이며 울적함에 젖었다. 기억 속의 옛일은 묵은 신경통처럼 눈비에 쉬이 아픔이 도진다. 시야가 밝아져 눈 덮인 산과 나무가 보이고서야 서설(瑞雪)의 기쁨이 솟구쳤다.
■ 나직한 초가지붕과 기와지붕, 논에 쌓아둔 낟가리와 논바닥, 먼지 날리는 신작로, 높고 낮은 산을 하얗게 덮은 산골의 눈은 상서로운 기운으로 넘쳤다. 큰눈 내린 뒤 마당에서 집밖으로 길을 내느라 땀을 흘리면서도 보리 농사가 풍작일 거란 얘기와 눈 놀이로 즐거웠다. 도회의 눈은 대개 귀찮고 더러웠다. 시커먼 발자국에 이내 더럽혀지고, 녹아서는 흙탕물을 튀기고, 사람을 자빠뜨리고, 차를 미끄러뜨렸다. 서설이기는커녕 '흉설(凶雪)'이었다.
■ 물론 서울에도 서설은 온다. 중학동 옛 한국일보 사옥 꼭대기에서 둘러보는 설경은 장관이었다. 가운데는 북악산과 청와대, 경복궁으로 흐르고, 왼편으로 인왕산에서 서촌, 오른편 옛 미대사관 숙소에서 북촌으로 치닫는 세 갈래의 설경은 저마다의 자태를 뽐냈다. 겨우 컴퓨터 사진첩에 숨죽이고 남았지만, 언제 꺼내 펼쳐도 상서로운 숨결이 되살아난다. 이처럼 좋은 경치가 아니더라도 마음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는 눈은 언제나 예쁘고 깨끗하다.
■ 마음 없는 눈에 길흉(吉凶)이 따로일까. 그저 사람 마음이 빚은 갈래다. 그래도 어제 내린 눈은 분명 서설이다. 며칠 동안 따갑고 칼칼하던 목이 어제는 견딜 만했다. 자세히 보니 여느 때처럼 새하얗지 않고, 먼지 묻어 누런 빛이 도는 눈이었다. 연일 수도권 주민을 괴롭히는 미세먼지를 덜어준다면 얼마든지 반길 만하다. 아파트단지의 연로한 경비원들이 짊어진 격무가 마음에 걸리지만, 주민 모두 작은 힘이라도 보태는 방법으로 풀어야 할 문제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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