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중략)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춰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인가."
연단에 선 강사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상집 일부를 소리 내 읽었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응시하는 청소년 5명의 눈빛은 진지했다. 언뜻 보기엔 작은 학원의 수업시간처럼 보이지만 이 곳은 서울 동대문경찰서 청소년 상담실이다. 강사는 이 경찰서 이은애(39) 여성청소년과장, 학생들은 '비행'을 저지르고 경찰서를 찾은 청소년들이다.
17일 경찰서에서 만난 이 과장은 "청소년들은 좋은 성적, 돈, 권력 등 어른들이 정해 놓은 성공의 기준에 자신이 부합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일탈을 저지른다"며 "이들에게 '성공과 행복의 길은 다양하다'는 진리를 전하는 것이 청소년 선도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이 과장이 인문학 책에 이런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지난해 2월 동대문서 여성청소년과장으로 부임한 직후 무면허 오토바이 운전 등으로 경찰서에 온 K(16)과의 만남이 계기였다. 어떤 삶을 살고 싶으냐는 이 과장의 물음에 K군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돈만 많이 벌면 돼요. 돈만 있으면 사람도 죽이는 세상이잖아요"라고 답했다. 자신 역시 돈을 최고라 여기는 세상에 살면서 '돈보다 네 행복이 먼저'란 말을 차마 해줄 수 없었다는 이 과장. 그 때 과거 감명 깊게 읽었던 인문학 책들이 떠올랐다. 백마디 말보다 삶과 행복에 대한 통찰이 고스란히 담긴 한 줄의 문장이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지 않을까. 입건을 유예 받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4~10주 간 봉사활동 심리상담 미술치료 등 선도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늘 뭔가 부족함을 느꼈던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난해 7월부터 본격적으로 생텍쥐페리의 , 조영래 변호사의 , 버트런드 러셀의 등 국내외 서적 20여권에 대한 '인문학 강의'를 선도프로그램에 넣었다. 강의는 주 1회 청소년들에게 읽을 책을 정해주고 내용에 대해 의견을 나눠보는 식으로 이뤄졌다. 지난 6개월 동안 청소년 100여명이 이 과장의 강의를 들었다.
초반엔 책을 읽어오기는커녕 읽으라고 준 책마저도 잃어버리고 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이 과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강의가 끝난 후에도 청소년들을 자신의 사무실로 한 명씩 불러 책 내용을 포함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청소년들이 어렵게 느낄만한 책들은 A4용지 한 장에 요약을 해서라도 책이 주는 의미를 전달하며 느낀 점을 들으려 했다.
반항심으로 가득 찼던 청소년들의 눈빛도 서서히 누그러졌다. 중학생 때부터 절도로 경찰서를 들락거렸던 한 남학생(16)은 톨스토이의 를 읽은 후 "이 사람이 쓴 다른 책도 소개해달라"며 사무실을 찾기도 했다. 이 과장은 "책 한 권으로 아이들의 마음이 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단지 좋은 대학, 좋은 차, 좋은 집 말고도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다는 걸 알려주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때론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삶과 행복'을 말할 수 있을까 회의를 느끼기도 하지만 이 과장은 인문학 강의를 계속할 생각이다. "누구나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삶을 살든 존중 받을 자격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고 싶어요."
조아름기자 archo1206@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