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보험공사는 지난 해 11월말 신임 상임감사 공모에 나섰다. 당시 내세운 첫번째 자격요건은 예금보험 업무에 대한 지식 및 경험이었다. 하지만 50일 가까운 선임 절차를 거쳐 17일 발표된 신임 감사는 문제풍 전 새누리당 충남 서산ㆍ태안선거대책위원장. 국회사무처 국제국장, 국회 농림해양수산위 전문위원, 국회 방송통신특별위 수석전문위원 등 그의 이력 어디를 살펴봐도 예금보험 업무와 관련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 자리가 일찌감치 정치권 몫이었다는 점에서 그리 새삼스럽지는 않다. 전임 이상목 감사 역시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민원제도개선비서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공공기관 감사 자리는 공공기관장에 비해 감시망이 느슨한 반면 경영성과에 대한 책임 부담은 거의 없다. 그래서 '눈 먼 자리' '꿀 보직'으로 통한다. 특히 금융관련 공공기관 감사는 연봉이나 처우 면에서 다른 공공기관을 압도한다. 금융 공기업 감사들이 받는 연봉은 전체 공공기관 감사의 평균연봉의 5배를 훌쩍 넘는다.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알리오)에 따르면 11개 금융관련 공공기관 상임감사의 2012년 연봉 평균은 2억4,618만원이다. 전체 295개 공공기관 감사 평균연봉(4,556만원)보다 무려 5.4배나 많은 액수다.
그러다 보니 금융 공기업의 경우 정치인과 금융 및 경제 관료, 그리고 감사원 출신 인사 등이 나눠먹기 식으로 감사 자리를 꿰차는 게 보통. 낙하산끼리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아무런 연줄이 없는 전문가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자리가 돼 버린 것이다. 정부가 공공기관 개혁을 밀어 부치는 와중에도 연초부터 금융 공기업을 중심으로 공공기관에 낙하산 감사들이 줄지어 입성하는 이유다.
예보와 비슷한 시기에 신임 감사 공모에 나섰던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도 전날 정송학 새누리당 서울 광진갑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을 상임감사로 임명했다. 정 신임 감사는 지난해 치러진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서울 광진구갑 지역구에 출마했다 낙선했다. 캠코 감사 자리는 한동안 감사원 출신이 독식해 왔는데 이번에는 치열한 경쟁 끝에 정치인 보은 인사 자리로 탈바꿈한 것이다.
기술보증기금도 최근 박대해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을 상임감사로 임명했다. 박 신임 감사는 지난 2008년 18대 총선에서 '친박연대' 후보로 당선된 뒤,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부산 연제구청장을 지냈고, 안전행정부(당시 행정안전부) 등을 소관하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금융 관련 경력은 전무하다.
경제 관료는 신용보증기금 감사 자리(조인강 전 금융위 자본시장국장)를, 감사원에서는 한국주택금융공사 감사 자리(김충환 전 감사원 감사교육원장)를 하나씩 꿰찼다.
다른 공공기관 감사 자리 역시 처우가 다소 떨어지긴 해도 감시망에서 비껴있는 만큼 낙하산 행렬이 줄을 잇는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한나라당 대표실 출신 조청래 전 청와대 행정관이 코레일관광개발 감사로, 윤태진 새누리당 인천 남동갑 당협위원장이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감사, 또 류중하 전 새누리당 부대변인이 근로복지공단 감사로 각각 자리를 옮겼다. 공공기관 임원 공모에 지원한 경험이 있다는 한 인사는 "공모가 시작되기 전부터 정치권과 인맥이 닿아있는 누구누구가 내정됐다는 말이 나돈다"이라며 "관련분야 전문성을 높이 평가 받아 가까스로 해당 공공기관 임원추천위원회가 선정하는 3배수 후보에 이름을 올리더라도 공공기관운영위원회(공운위) 등을 거치면 순위가 뒤바뀌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근무 경험이 있는 중앙부처 한 공무원은 "공공기관 임원 인사검증에 올라오는 후보자 중 관련분야 전문성을 갖춘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며 "혈연ㆍ지연만을 앞세운 사람도 후보군으로 버젓이 이름을 올리는 현실에서 낙하산 인사 근절까지는 갈 길이 멀다"고 고개를 저었다.
이동현기자 nani@hk.co.kr
이대호 인턴기자 (서강대 미국문화학과 3년)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