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을 발휘한 사례가 뭡니까."
경영평가위원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말문이 막힌다. 몇 달간 직원들이 밤샘작업으로 만든 보고서 내용을 소상히 설명해도 상대의 표정은 신통치 않다. "보고서는 꼼꼼히 읽으셨냐"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다 보니 '다른 공기업 사장처럼 고액과외라도 받아볼걸'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위원들 섭섭하지 않게 차까지 보내줬는데, "잘 봐주십시오"란 부탁까지 하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 '위원 이름 잘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연구용역이라도 밀어줘야지.' (공공기관장 A)
올해도 400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만들 생각하니 끔찍하다. 지난 연말에 두 차례 회의를 했으니 곧 집합명령이 떨어질 것이다. 적어도 4박5일은 꼼짝없이 집에 못 간다. 3개월간 연일 야근에 합숙(6박7일+10박11일)까지 밥 먹듯 한다는 다른 기관에 비하면 그나마 사정이 낫다. 보고서 분량 600페이지에 표지부터 마지막 쪽까지 올 컬러로 도배해 위원들의 환심을 사던 시절이 그립다. 요즘엔 표지 모양, 페이지 수(400쪽), 색깔(2도 인쇄 흑백)까지 지침이 내려와 있다. 이번에는 더 심하게 방만경영을 트집잡을 텐데, 이미 고강도 검증을 한 마당에 또 무슨 꼬투리를 잡힐까 다들 전전긍긍이다. 감사원 감사야 욕 한번 세게 먹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경영평가는 직원들의 성과급이 달린 막중한 사안. 그래서 더 열심히 준비했는데 올해는 영 힘이 안 나고 갈피를 못 잡겠다. "올해 성과급은 포기했다"는 동료 직원들의 푸념이 오히려 위안이 된다. (공공기관 직원 B)
공공기관 경영평가는 공기업 효율성 제고와 방만경영 해결을 위해 꼭 필요한 정책이다. 그래서 매년 진행되고 있고, 해당 공기업들은 연초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죽기살기로 매달린다. 하지만 평가로 경영상태가 나아졌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때도 공공기관 선진화 정책을 내세워 인원감축, 통합, 지분 매각, 심지어 민영화 등을 임기 내내 밀어붙였지만 공공기관 부채는 더 늘어났다.
오히려 공공기관 경영평가 신뢰도에 대한 잡음만 요란하다. 기관장이 전년 경영평가위원들로부터 고액과외를 받고, 해당 직원들은 세 달간 야근과 합숙을 하느라 밤잠을 설치고, 위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슬그머니 연구용역을 밀어준다는 등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려운 얘기들도 떠돈다.
공공기관 관계자들이 "우리 기관 얘기는 아닌데"라며 털어놓는 공공기관 경영평가에 얽힌 각종 난맥상을 듣고 있노라면 공공기관 혁신에 앞서 제대로 된 평가부터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쉽게 말해 시험 출제와 채점을 제대로 해야 정확한 성적이 나오고 응시생도 결과에 승복할 것이란 얘기다.
특히 올해 정부는 방만경영 등을 문제 삼아 38개 공기업을 중점관리대상으로 선정해 고강도 평가를 예고하고 있다. 반면 해당 공기업 노동조합들은 "경영평가 전면 거부"로 맞서겠다며 집단행동을 벼르고 있다. 지난 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공기업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정확하고 합리적인 평가가 절실한 시점이다.
공기업들은 평가의 기준이 모호하다고 입을 모은다. 매년 말 기획재정부가 편람(기준)을 내려 보내지만, 거기에 맞춰 준비를 해도 주로 교수들로 구성된 경영평가위원들의 입맛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실사는 검사(경영평가위원)와 피고(공공기관장)가 있는 법정 분위기인데다 학자 관점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만을 읊으니 대응이 쉽지 않다"(공기업 C) "전문성이 별로 없으니 자꾸 보고서 외의 자료를 요구한다"(금융공기업 D), "지난 번엔 넘어갔는데 이번엔 감점이 되기도 한다"(에너지공기업 E)는 것이다. 심지어 한 공기업 관계자는 "지난해 위원들이 지적한 부분을 1년간 열심히 보완하고 수정했더니 다음에 온 위원들이 뒤집어엎더라"고 씁쓸해했다.
그러니 평가위원을 했던, 또는 될 법한 교수들을 찾아가 로비를 하기도 한다. 그나마 기재부가 위원들에 대한 윤리지침을 마련한 뒤부터는 관련 로비가 많이 줄었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하지만 공기업 관계자는 "평가위원 물망에 오른 교수가 먼저 은밀히 연구용역을 제안해 오면 다음을 위해 거절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경영평가가 계량지표보다는 비계량지표 비중이 높아 정치바람을 많이 탄다는 것이 문제다. 기관장 평가에서 상위등급을 받은 기관은 대개 기관장이 고위관료 출신이거나 정권 실세인 곳이다. 또 평가 항목 중 고유업무에 대한 평가(사업지표) 비중보다 권장정책 이행실적 등(비사업지표)의 비중이 높다 보니 부채가 늘더라도 정권이 원하는 사업을 해야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이러니 문제가 지적될 때마다 기재부가 매번 개선책을 내놓아도 무용지물이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더구나 평가에 대한 공공기관의 이의신청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 지난해 산업기술시험원(KTL)이 D등급을 받고, 평가가 상식에 어긋난다며 이의제기를 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은 게 대표적이다. 당시 남궁민 KTL 원장은 "정원이 묶인 상태에서 그나마 비정규직을 활용해 좋은 실적을 냈는데 왜 감점이 되냐"고 항변했지만, 기재부는 "모든 기관을 같은 잣대로 평가하다 보니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그래서 공공기관들은 이의신청을 '오자 수정' 정도로 받아들인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민간기업의 경영평가는 전부 객관화한 계량지표로 평가한다"며 "공공기관 평가에서도 주관적인 평가를 배제한 계량지표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성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정권마다 매번 입맛에 맞춰 평가 항목을 바꾸다 보니 기관들이 발전하거나 장기비전을 가질 수 없다"며 "활발한 의견 수렴을 거쳐 일관된 평가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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