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ㆍ대한제국의 정치인 윤치호(1865~1945)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서 원본이 미국 에모리대에 보관돼있다고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의 혜문 스님이 16일 밝혔다. 독립협회 회장을 지낸 윤치호는 일제시대에 전향한 대표적인 친일파다.
혜문 스님은 이날 "윤치호가 직접 애국가를 쓰고 서명한 문서가 에모리대 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 문서에는 애국가가 1절부터 4절까지 한글 붓글씨로 쓰여 있으며 '1907년 윤치호 작'이라는 서명까지 붙어 있다.
이에 따라 혜문 스님은 각계 인사들로 애국가 작사본 100인 환수위원회를 구성하고 17일 오전 11시 서울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발대식을 갖기로 했다. 혜문 스님은 30일 안민석 민주당 의원과 함께 미국 애틀랜타에 있는 에모리대를 방문, 윤치호의 애국가 원본을 조사할 계획이다.
애국가는 안익태가 작곡을 했지만 작사자는 누군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작사자 미상' 상태로 남아있다. 윤치호 작사설의 근거는 윤치호가 1907년 번역한 '찬미가'란 책의 14장에 애국가가 수록돼 있고 1910년 9월 2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교민단체인 국민회의의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에 애국가 가사가 윤치호 작사로 보도됐기 때문이다. 일본총독부가 1911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해 105인의 독립운동가를 투옥시킨 105인 사건 당시 일제 경찰의 수사기록 등에도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로 기재돼 있다.
국립국어원의 1991년 조사 이후 애국가 후렴구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는 최소한 윤치호가 쓴 것으로 이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부는 앞서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 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윤치호, 안창호 등 5명의 자료를 심사했는데 그때는 윤치호 작사설이 11대 2로 다수를 차지했다. 국사편찬위 보고서에 따르면 최남선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은 "'1907년 윤치호 작'이라는 글이 진짜라면 윤씨가 가사를 썼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언급했었다. 그러나 국사편찬위는 당시 만장일치가 아니라는 이유로 작사자를 확정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지금까지 작사자는 미상으로 남아 있다. 에모리대에 있는 윤치호 친필본이 진본으로 확인되면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라는 사실이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혜문 스님은 "애국가는 한 사람이 작사했다가 보다 윤치호, 안창호 등 다수가 창작하고 보급했던 민족의 노래로 볼 수 있다"라며 "윤치호의 친필 원본은 당연히 환수돼야 할 중요한 국가기록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윤치호가 친일 전력 때문에 애국가 작사자란 사실이 부정돼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윤치호는 독립협회 회장을 지낸 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5년 동안 옥살이를 했지만 1930년대 이후 친일로 돌아서 태평양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그 공로로 일본 제국의회의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이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강만길)가 2006년 반민족친일행위자를 공식 발표할 때 대표적인 친일파로 분류됐다.
●독립운동가서 친일 전향
윤치호는 독립협회 회장을 지낸 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5년동안 옥살이를 했지만 1930년대 이후 친일로 돌아서 태평양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그 공로로 일본 제국의회의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이 때문에 친일반민족행 위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강만길)가 2006년 반민족친일행위자를 공식 발표할 때 대표적인 친일파로 분류됐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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