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남성 이모씨는 올해로 약을 끊은 지 10년째다. 병이 완전히 나은 건 아니지만 여느 건강한 이들과 별 차이 없이 생활한다. 검사에서 재발이 걱정됐던 적이 지난 10년 동안 두 번 정도 있었지만 다행히 치료 없이도 별 탈 없이 넘어갔다. 그가 앓는 병은 혈액암인 만성골수성백혈병이다. 몸에 암세포는 남아 있지만 희한하게도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얌전하다. 이렇게 오래 복약을 중단한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는 이씨가 처음이다.
과거 불치병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만성골수성백혈병이 평생 약 먹으며 잘 관리하면 되는 만성질환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이제는 조심스럽게 완치를 내다본다. 약 안 먹어도 암이 활동하지 않는 '기능적 완치'에 국제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암 같은 중병을 다루는 의사들은 완치라는 표현에 유독 민감하다. 다 제거된 듯 보이던 암이 환자도, 의료진도 모르는 사이 훌쩍 자라 재발하거나 전이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그런데도 한국을 포함해 프랑스, 일본 등의 의료진이 복약을 중단하는 기능적 완치 임상연구를 진행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환자는 항암제 복용의 부작용에서 벗어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고 보건당국은 건강보험 재정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능적 완치'가 암세포가 다 제거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약을 끊었는데도 암세포가 최소한만 남은 채 더 늘지 않고 증상이 안 나타나는 상태가 지속되는 걸 말한다. 암세포가 끊임없이 새끼 치며 증식하는 본래 기능을 안 한다는 얘기다.
올해로 5년째 국내 15개 병원과 함께 기능적 완치 임상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김동욱 서울성모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팀은 "지금까지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 100명이 약을 끊었고 그 중 이씨를 포함해 약 70%가 약을 안 먹은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재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복용 중단 후 재발은 보통 6개월 이내에 가장 많다고 알려져 있다.
장기나 조직을 공격하는 모든 암세포는 암 줄기세포에서 만들어진다. 실제로 단백질을 비롯한 체내 대사물질을 소비하며 새끼 암세포들을 만들어내는 건 전체 암 줄기세포의 약 1%에 불과하다. 나머지 99%는 휴지기 상태에 있다. 백혈병 치료제 등 항암제 대부분은 활동 중인 1% 암 줄기세포의 새끼들을 공격한다. 이렇게 항암제를 오랫동안 쓰다 보면 활동이 활발한 암세포는 거의 죽고 검사에서 암 유전자 수가 '0'으로 기록된다.
기능적 완치 연구는 바로 이런 환자들을 주목한다. 암세포가 존재하긴 하지만 장기 기능과 환자 생명에 영향을 주지 않고, 활동하지 않은 채 얌전히 있는 상태가 이어진다면 굳이 부작용 많고 비싼 항암제를 평생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유지될 수 있는 요인으로는 환자의 면역력이 꼽힌다. 암세포 수가 일정 수준 이하로 줄어든 상황에선 새로 암세포가 생겨나더라도 면역세포가 알아서 제거한다는 보고가 나와 있다. 면역세포의 능력을 키우면 기능적 완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거란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그러나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몸 안에 암세포가 존재하는 한 항암제 복용을 중단해서는 안되고 완치로 봐도 안 된다는 것이다. 국제학계에서 기능적 완치 기준이나 지침이 나오지 않는 한 신중해야 한다는 견해다. 암 유전자를 찾아내는 기술의 정확도나 예민도가 병원마다, 의료진마다 다르다는 점도 기능적 완치의 걸림돌이다. 약을 먹어야 하는지, 안 먹어도 되는지를 유전자 검사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기능적 완치 환자가 많아지더라도 진단 초기에 약을 제대로 복용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데는 대다수 전문의가 동의한다. 김 교수는 "진단 직후 2, 3년은 암세포가 가장 많은 시기"라며 "이 기간 동안 환자 마음대로 약을 끊으면 암세포에 유전자 변형이 쉽게 일어나 약에 내성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기능적 완치는커녕 치료 자체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김 교수팀의 임상연구에선 표적항암제를 적어도 3년 이상 썼고 예민한 유전자 검사에서 2년 넘게 암 유전자가 나오지 않은 환자들만 약 복용을 중단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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