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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느린 말을 타는 즐거움

입력
2014.01.1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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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는 감회는 올해도 얼마나 바쁘게 살아야 할까 하는 우려에서 시작된다. 그래도 올해의 다짐은 느긋하게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잡아본다. 그리고 문득 소를 타고 길을 나서면 어떨까,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 권근이 남긴 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려가 망한 후 벼슬을 거부하고 버티다가 경상도 평해로 귀양 간 이행이라는 문인이 있었다. 그는 지금도 풍광이 아름다운 평해에 물러나 살면서 달밤이면 술병을 차고 소 등에 올라 산과 물로 놀러 다녔다. 그래서 스스로 호를 기우자(騎牛子), 곧 소를 타고 노니는 사람이라 하였다. 벗 권근은 그를 위하여 '기우설'(騎牛說)이라는 글을 지었다. 이 글은 느긋한 여행의 방도를 운치 있게 말하고 있다.

'산수를 유람하는 데는 오직 마음속에 사사로운 욕심이 없어야 그 즐거운 바를 즐길 수 있다'라는 멋진 말로 글을 열었다.

여행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욕심을 갖는 순간 진정한 여행의 즐거움은 사라진다. 목적 없이 길을 떠나는 것이 진정한 여행의 즐거움이다. 또 여행은 돌아올 것을 기약하지 않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여행이라면 서두를 것이 없다. 서두르지 않아야 여행의 참맛을 알게 된다. 그래서 권근은 사물을 볼 때 "빠르면 정밀하지 못하지만 느리면 그 오묘함을 다 얻게 된다"라 하였다. 천천히 가야 여행의 오묘함을 다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빠른 말이 아니라 느린 말이 어울린다. 말은 빠르고 소는 더디니, 소를 타는 것은 곧 더디고자 함이다.

기우자 이행은 그래서 소를 타고 다녔고 스스로의 호를 기우자라 한 것이다. 밝은 달이 하늘에 있는데 산은 높고 물은 넓어서 하늘과 물이 한 가지 빛이 되었다. 그러면 끝없이 위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아래의 물을 내려다보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만사를 뜬구름 같이 여기고 맑은 바람에 길게 휘파람을 불면서, 소는 고삐 풀어 가는 대로 맡겨두고 홀로 술을 부어 마시는 것이 그의 삶이었다. 이렇게 가슴속이 시원하니 어찌 절로 즐겁지 않겠는가? 사사로운 욕망에 얽매인 자는 이렇게 할 수 없으리라.

아름다운 산과 물을 보러 길을 떠나는 사람의 마음은 이러하여야 할 것이다. 마음에 사사로운 욕심이 없다면 굳이 느린 소가 아니라 빠른 말을 탄들 어떠랴. 18세기의 시인 이병연은 소가 아닌 말을 타도 마음의 여유를 누릴 줄 알았다. '나는 말을 탔네'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나는 말 타고 자네는 소 타는데,

소는 어찌 빠르고 말은 어찌 느린가?

자네에게 채찍 있어도 내게 없어서인가,

가끔 흰 구름 두둥실 물가에 말이 선다네.

말을 서니 어찌 시 한 수 읊지 않으랴,

소가 코로 듣고서 머뭇머뭇 하겠지.

말은 소보다 빠르지만 굳이 빨리 가고자 하지 않으니, 오히려 채찍을 치는 소보다도 느리다. 내 마음이 더딤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가다보면 가끔 맑은 개울물에 흰 구름이 비친다. 시인의 마음을 미리 알았나, 말이 멈추어 선다. 시인이라면 말이 서는데 어찌 시 한 수 읊조리고 가지 않겠는가? 이때 곁에 있던 소가 코를 실룩인다. 소는 늘 말보다 느리다고 여겼는데 웬일인지 이번에는 말이 자기보다 느리기에 으스대었나 보다. 그러다 시인이 시를 읊조리는 낭랑한 소리를 듣고서야, 시인의 풍류를 알아차렸다. 아뿔싸, 늦었지만 소가 발걸음을 늦춘다. 시인과 말과 소가 이렇게 서로 뜻이 맞았으니, 소를 타든 말을 타든 중요한 것은 그저 마음의 여유일 뿐이다.

그러나 올해는 말의 해인지라 걱정이 앞선다. 고삐를 당겨도 발걸음을 늦추지 않는 말을 타게 될까 겁이 난다. 게다가 갑오년이니 120년 그 해를 생각하면 올해도 얼마나 분주한 말의 해가 될까 걱정이다. 그래도 달리는 말 등에서도 여유를 찾았으면 하는 것이 올해의 바람이다. 그러면 여행만 즐겁고 말겠는가. 느린 말 등에서 외려 세상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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