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하니 이 집, 이번 여행은 튼 것 같다. 마흔 중반의 부부와 아이 둘, 시동생인지 처남인지 하나, 그렇게 다섯 식구가 초저녁부터 시끄럽다. 마른 장작 젖은 장작 구별도 못하는 걸로 봐서 구들에 불 넣어보기는 분명 처음이다. 두 남자가 콜록대면서 겨우 깜부기불 붙은 아궁이에다 은박지에 싸온 걸 욱여넣는다. 그렇게 해서도 바비큐가 된다면 조왕신이 노할 노릇. 배고픈 애들은 입이 나왔고 애 엄마는 동네에 슈퍼도 없다고 투덜댄다. 두어 시간 뒤. 어찌어찌 저녁을 해먹고 방으로 들어갔나 본데, 댓돌 위에 벗어둔 신발 다섯 켤레가 나란하다. '신문지에 싸서 방 안에…' 얘기를 해줄까 하다가 말았다. 그렇게 알아갈 것이다. 불편하고, 적잖이 번거롭고, 서리 앉은 신발에 발을 꿰다 화들짝 놀라게 되지만, 두고두고 생각이 날 우리의 옛집, 옛 마을의 온기를.
"덜 당기면 맛이 나남? 이백 번, 이래 잡아 빼야 짱짱해지지. 덜 빼면 능청능청하니 못써 부러. 자, 잡숴봐. 아삭아삭하니 맛있제?"
핑계는 엿이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4구, 강골마을. 겨울 한 철, 이 마을은 '달달하니 꼬순' 엿 고는 냄새로 지나가는 사람의 발을 들러붙게 만든다고 들었다. 오가며 이곳을 들러볼 기회는 많았지만, 그래서 "크리스마스 지나고 달포쯤 있다가 오라"는 마을 운영위원장의 말을 착실히 지켜 찾아갔다. 마을 복판에 자리잡은 중요민속자료 제160호 이식래 가옥, 그게 얼마나 오래된 집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 집 안채에서 아짐(아주머니)들이 조청을 잡아당겨 엿을 빼는 모습은 솔찬이 오래돼 보였다. 아짐들의 묵은 몸짓, '짱짱한' 입담을 보고 듣고 하다 보니 해는 어느새 져부리고, 서쪽 하늘엔 음력 초여드레의 달이 대롱거리고 있었다.
강골마을은 광주(廣州) 이씨의 집성촌이다. 서른 가구 남짓한 집 중에 3분의 2가 광원군 이극돈(1435~1503)을 할아버지로 모신다. 나머지 집들은 대개 이씨와 혼인을 맺어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된 집들이다. 그러니 멀다고 해도 재종고모이거나 사장어른이거나 그런 호칭을 써야 할 관계일 텐데, 너나없이 나이를 잡술 만큼 잡수신 터라 아짐들은 촌수 같은 건 따질 것 없는 동무처럼 굴었다. "아고, 굵잖어. 완전 파닥파닥 해부렀네, 뒤로 밀려갖고." "몰러. 이것만 하믄 끝이여. 만날 이러고 앉았더니 발꼬락이 아파 못 하겄네." "병원 안 갔다 왔어?" "정형외과를 갈 꺼인디 읍내 병원이 낼까지 쉰대. 서울서 애기들이 올라오라고 난리쌓는디, 이놈의 엿 때문에 갈 수가 있나…."
남도의 따순 볕과 바다의 소출이 두루 넉넉한 보성. 활성산(465m) 자락의 차밭이-차보다는 풍광으로-유명해져서 제일 먼저 관광지가 됐다. 다음 갯벌의 푸진 먹거리로 여자만(灣)의 이름이 알려졌다. 요즘은 소설 의 배경인 벌교읍과 근대 판소리의 요람인 회천면을 정비하느라 바쁘다. 이런저런 구실이 모두 부족했는지 강골마을이 위치한 득량면은 그냥 드러낼 것 없는 농촌, 혹은 어촌으로 여태 남았는데, '코스'에서 벗어나 있었던 덕에 저 우악스러운 개발의 바람을 타지 않고 옛 마을의 정취를 지니고 있다. 흙과 돌로 담을 쌓은 조붓한 길을 구불구불 돌면 나타나는 초가와 기와, 이젠 그것보다 예스러움이 못할 것도 없는 슬레이트 지붕이 나지막한 하늘을 나눠서 받치고 있는 곳이 이곳, 강골마을이다.
강골마을의 해는 멀리 고흥반도 쪽, 너른 경작지가 펼쳐진 평야 위로 떠오른다. 그러니 마을은 예로부터 떵떵거리던 만석꾼의 동네가 아니었을까. 아니었다. 지금 마을로 들어가볼 작시면, 면사무소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쭉 뻗은 도로를 타고 가다가 경전선 철길을 건너 좌회전, 다시 다리 건너 좌회전하면 된다. 그러면 구릉지에 층층이 들어앉은 마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건 1937년, 득량만 간척사업이 끝나고 드넓은 갯벌이 농토로 바뀐 뒤에야 가능해진 일이다. 전까지 바다는 바투 마을 동구까지 다가와 있었다. 마을로 진입하는 도로는 대숲 사이로 난 좁은 길이었다는데, 그래서 고샅고샅 굽이를 돌 때마다 마을은 한 겹씩 모습을 드러냈단다. 토석담과 대나무, 탱자나무로 엮은 생울타리는 지금도 남아 있다.
마을의 볼거리는 우선 옛집이다. 네 채가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데 정자를 제외한 세 채는 지금도 살림집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지은 것이니 역사책에서 이름을 봤던 어른들의 집일 까닭은 없고, 대신 역사책엔 부피 있는 줄거리를 남기지 못한 근대 부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다. 건축학자 한필원에 따르면 이 시기의 부농들은, 더는 반상의 질서에 매이지도 않고 부를 드러내는 것을 삼가지도 않아서, 기세등등하게 집을 지었다. 안채도 바깥 풍경을 맘껏 즐길 수 있도록 터를 높게 잡았다. 곡물을 저장하는 곳간은 집안의 부만큼 크게 만들고 지붕엔 기와를 올렸다. 반대로 열화정은 풍광을 즐기기 위한 정자임에도 야트막한 언덕의 울울창창한 대숲 속에 숨어 있다.
책 뒤져보면 나오는 얘긴 그쯤 하고 다시 엿 만들기로 돌아가보자. 강골마을에서 엿을 만든 건 언제부터일까. 모른다. 아짐들은 그저 "나가 시집오기 한참 전부터"란다. 여하튼 음력 동짓달 추위가 들면 시작해서 이듬해 열화정 연못에 동백꽃 벙그러지면 끝난단다.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쌀눈이 남은 멥쌀로 고두밥을 쪄서 보리엿기름에 섞어 뜨듯한 방에서 한 밤 재우면 식혜가 된다. 그걸 네댓 시간 푹 고면 조청이 되는데, 방으로 가져간 뒤 떡반죽처럼 뚝 떼서 둘이서 붙잡고 잡아 당기기를 수백 번 계속하면 하얗게 엿가락이 된다. 그걸 '바람 넣는다'고 한다. 엿 만드는 일은 새벽 다섯 시 가마솥에 식혜를 붓고 끓이는 것에서 시작돼 저녁 예닐곱 시, 밥과 기름을 섞어 다음날 쓸 식혜를 만드는 것으로 끝난다. 중노동이다.
"왜 여자들만 하긴? 남자들이 누가 요것을 하겄소? 이게 기운만 갖고 한다요. 잘잘잘하게 농도도 맞춰야 하고, 엿에 바람도 넣어야 하는디."
이튿날, 새벽 일찍 일어났다. 엊저녁 봤던 다섯 식구의 신발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조청 달이는 아궁이 곁으로 갔다. 뚝 떨어진 기온이지만 다섯 아궁이가 활활 타오르는 부뚜막은 따스했다. 전날 "딴 데는 분이라도 칠하고 나오지만 우린 만날 시커머니 나온다"면서 사진 찍는 걸 꺼리던 아짐이 "존 잠 안자고 새벽부터 고상"이라면서 달이던 식혜를 한 그릇 떠 줬다. 달면서 은은했다. 뱃구레 깊숙이부터 따뜻해졌다. 그런데 이어진 대화는 꼭 그렇지 못했다. 시시콜콜 그 얘기를 옮겨 적는 건 적절치 않을 것 같다. 지난해 강골마을에선, 마을을 잘 가꿔보자는 사업이 어떤 난관에 부딪쳤다고만 해두자. 하지만 그 정도 사달에 흔들리기엔, 뜨듯한 인심의 뿌리가 너무 깊어 보였다. 수탉이 울기 시작했고 멀리, 바다였던 들판으로 미명이 번지고 있었다. 아짐들은 묵묵히 엿을 달였다.
"뭐 볼 게 있다고 여 와 봤던 사람들은 기어이 또 찾아오더랍소. 저 자고 있는 식구도 그렇고. 아따, 손(손님) 왔다고 오늘은 바람도 점잖게 부네."
[여행수첩]
●2번 국도와 845번 지방도 교차로에서 '강골전통마을'의 이정표를 볼 수 있다. GS정유소 앞에서 좌회전, 2㎞ 정도 가면 다리가 나온다. 다리 앞에서 좌회전 한 뒤 왼쪽에 보이는 첫 번째 마을.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동광주IC가 가깝다. ●한옥 숙박과 여러 가지 체험 프로그램이 있지만 이용 가능 여부를 미리 확인해야 한다. 이용욱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59호)은 명품고택으로 지정돼 조만간 숙박객을 받을 예정이다. 강골마을 쌀엿은 인터넷(http://gg.invil.org)을 통해 구매할 수 있다. (061)853-2885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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