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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120> 6월 항쟁의 도화선, 박종철군 고문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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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120> 6월 항쟁의 도화선, 박종철군 고문치사

입력
2014.01.1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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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가슴을 쥐어뜯는 아버지의 독백이 아들의 유골가루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누구보다 영민하고 성실한 아들이었기에 한줌 재로 돌아온 현실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충격과 슬픔이었다.

삭풍이 몰아치던 임진강 하류가 점차 분노로 출렁이기 시작했다.

1987년 1월 14일 오전 11시 20분, 아름다운 세상을 꿈꿨던 23살 청년 박종철군이 공권력의 고문에 희생돼 세상과 이별했다.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재학 중이었다.

65년 4월 부산에서 태어난 종철은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말없이 공부 잘하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대학에 들어와 사회부조리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앞장서던 87년 1월 14일 새벽 서울 신림동 하숙집에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어두침침한 5층 건물 9호실은 철제 의자와 간이 침대 옆으로 물이 가득 찬 욕조가 구비돼 있었다.

"박종운은 어디 있나?"지명수배중인 박종운은 서울대 비공개 학생운동조직이었던 '민추위'핵심멤버였다. "모릅니다."

의자에 앉아있던 점퍼가 손을 내저었다. "시작해!"종철의 가슴 위로 주먹과 발길질이 내리쳤다. 옷이 벗겨지고 양손과 발목이 결박된 채 머리가 욕조에 처박혔다. 1회, 2회, 3회… 종철은 버텼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동지를 고자질 할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욕조 턱에 목이 걸려 숨을 쉴 수 없었던 그는 가쁜 침을 내뱉고는 힘없이 늘어졌다.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 오연상이 급히 호출돼 인공호흡을 시도했으나 이미 그의 몸은 싸늘히 식어있었다.

당황한 경찰은 수사 중 쇼크사로 처리해 화장부터 하기 위해 숨가쁘게 움직였다. 조직 고위층부터 조직적인 사건 은폐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하나 둘씩 터져 나왔다. 다음날 석간신문에 짤막한 사건기사가 터져 나왔고, 서울지검 최환 공안부장은 화장에 앞서 부검을 지시했다. 부검결과는 쇼크사가 아니라 물고문에 의한 것임을 밝히는 결정적 증거가 됐다. 부검의로 참여한 국과수 황적준박사의 일기는 이듬해 사건 최종책임자였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구속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일선 형사 2명이 모든 책임을 지고 사건을 묻어가던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신부가 서울 명동성당에서 충격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범인은 3명이 더 있었고, 이들은 정권의 비호아래 지금도 버젓이 경찰로 활동 중"이라는 것이었다.

파장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사제단의 폭로는 전국민의 분노를 사며 시민들을 거리로 집결시켰고, 6ㆍ10항쟁의 기폭제가 돼 정권을 항복시키며 마침내 6ㆍ29 선언을 이끌어냈다.

27년 전 오늘, 꽃다운 나이의 박종철군은 우리 곁을 떠났으나 아직도 고비마다 부활해 민주화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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