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가 12일 한국사와 역사교육 관련 대표 학회 임원진을 대상으로 긴급 설문조사를 벌여 확인한 전문가들의 입장은, 최근 정부와 여당에서 거론되고 있는 역사 교과서 관련 정책 방향과는 상당한 괴리를 보였다. 교과서 국정체제로의 전환은 "거론 자체가 국격에 맞지 않는 부끄러운 일"이라는 지적이었고, 현행 검인정제도에 대해선 개선이 필요하나 오히려 정부 개입을 줄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역사교육학회ㆍ한국고대사학회ㆍ한국근현대사학회ㆍ한국역사연구회ㆍ한국현대사학회의 임원 33명 중 25명(76%)은 "현행 검인정제에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대다수가 내놓은 해결책은 '국정 교과서'가 아니라 '검인정 강화'였다. 하일식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군사독재 미화 등 과거 국정 교과서의 폐해를 고려한다면 검인정 과정 강화 쪽으로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설문에 참여한 대다수 전문가들은 우선 검인정제도 자체의 문제보다 교육부로부터 역사 교과서 검정을 위임받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역사교육학회 소속의 한 교수는 "지난해 10월 정부가 우편향 인사를 위원장에 앉히면서 국편조차 정파적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며 "학계의 중론과 달리 교학사 교과서가 검정 합격을 받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오류가 많은) 교학사 교과서 같은 것은 (검정 과정에서) 걸러줘야 했다"며 "국편에서 방만하고 무책임한 검정을 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런 이유로 아예 다른 교과목처럼 한국사도 교육과정평가원에 검정을 위임하거나, 정치적 입김이 미치지 않는 독립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하지만 이보다 다수의 지적은 검정위원과 기간을 늘리고 수준 미달의 교과서를 탈락시키는 식으로 검정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국편의 검정과정은 졸속이라고 할 만했다. 지난해 검정에서 검정위원 6명이 한국사 교과서 9종(1종은 불합격)의 검정심사를 불과 한달 만에 끝냈고 검정 합격을 받은 교과서에서도 오류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이기훈 목포대 사학과 교수는 "학계에서 3~5배수 정도 추천받아 검정위원의 수를 확대하고, 검정기간도 늘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를 위해 정부의 안정적인 예산 지원도 거론됐다. 한 교수는 "검정비용을 수익자부담원칙에 따라 출판사 당 2,000만~1억6,000만원까지 부담했는데 이런 제한 때문에 연구위원과 검정위원 숫자가 적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학자들 다수가 "정부 개입을 줄여야 한다"고 응답한 것도 편수조직을 만들겠다는 교육부의 방침과는 반대였다. 한 교수는 "집필기준, 검정지침 등에서 너무 세부적인 것까지 규정해 오히려 집필에 간섭하는 셈인데, 일선 학교의 채택과정마저 교사들에게 맡겨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또 교육과정이 너무 자주 바뀌어 교과서 집필이 빠듯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도 있었다. 권오현 경상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교과서 집필을 위해서는 최소 2, 3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교육과정이 자주 바뀌고 그 내용을 반영해야 해 충분한 연구ㆍ검토 없이 집필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국사편찬위원회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 8종의 집필기간은 평균 10개월에 불과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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