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에서 농사를 짓는 김진구(가명ㆍ62)씨는 요즘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 말 수가 부쩍 줄어들고 가족들의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80대 노모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치매 초기일 수 있으니 병원에 모시고 가라"는 주변의 얘기에 마음은 조급하지만, 치매전문병원은 물론 보건소만 해도 1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하는 터라 좀처럼 엄두를 못내고 있다. 김씨는 "검사만 받으러 가기도 쉽지 않은데 혹시나 치매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7일 아이돌그룹 슈퍼주니어의 멤버 이특(31ㆍ박정수)씨의 아버지와 조부모가 한꺼번에 사망하는 등 치매 문제로 인한 안타까운 사건이 줄을 잇고 있지만 정작 치매 또는 치매의심 가정을 도울 수 있는 법안 처리는 더디기만 하다.
19대 국회 개원 직후인 2012년 6월 새누리당 박대출 의원이 대표발의한 방문치매검진 의무화법이 처리됐다면 김씨는 최소한 모친이 치매를 앓고 있는지를 검사하러 가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며 자책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법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1년 6개월째 방치돼 있다.
지난해 연말에 발의된 다른 치매 관련법들의 조속한 처리도 장담하기는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현재 복지위에는 치매관리 우수 병원을 광역치매센터로 지정(민주당 정청래 의원ㆍ2013년 11월), 치매환자를 위한 정부ㆍ지방자치단체의 교통편의 제공(민주당 유승희 의원ㆍ2013년 11월), 우수 요양병원의 치매전문병원 지정(무소속 강동원 의원ㆍ2013년 12월)법안 등이 제출돼 있다. 최근 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당 정책위에서 치매환자 정책 마련에 적극 임해달라"고 당부하는 등 정치권이 뒤늦게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2월 임시국회도 쟁점법안 처리를 둘러싼 전장(戰場)이 될 것이란 예상이 많다. 복지위 관계자는 "정치적으로 별로 폼이 나지 않는 법안들이라 기초연금법 처리를 두고 여야 간 정쟁이 심화하면 뒤로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치권의 늑장 대응으로 피해를 보는 건 결국 치매를 앓고 있는 환자와 그 가족들이다. 치매는 24시간 환자의 곁에 보호자가 붙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특히 가족들의 경제적ㆍ정신적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도 어렵다. 이성희 한국치매가족협회 회장은 "정치권이 법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기만 하고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로는 가지 않고 있다"면서 "치매전문병원이나 데이케어센터 확충 등 치매환자와 가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조치를 법제화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2년 현재 우리나라 치매환자는 54만여명으로 65세 노인 10명 중 1명 꼴로 급속한 고령화 추세에 따라 2024년엔 100만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제는 일부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가 됐지만 국회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의 삶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민생법안들이 국회에서 장기간 발이 묶여 있는 경우는 비단 치매 문제만이 아니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사감위)가 지난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남녀의 도박중독률은 국민 100명 중 7.2명으로 프랑스(1.3명)나 뉴질랜드(1.7명), 영국(2.5명), 핀란드(3.7명) 등 주요 선진국의 2~3배에 달한다. 도박에 따른 사회ㆍ경제적 손실을 감안하면 이를 관리ㆍ감독할 법ㆍ제도의 정비가 시급하지만, 여야가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편 등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는 사이 불법게임물 감시를 위한 실태조사 권한을 사감위에 부여하는 초보적인 법안조차 1년이 넘도록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에서 발이 묶여 있다. 강신성 전국도박피해자모임 사무국장은 "정치권이 미적대는 동안 바다이야기 등 불법게임산업까지 다시 극성을 부리면서 청소년들까지 도박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학교폭력 예방ㆍ대책법 개정안은 19대 국회 들어서만 26건이 발의됐지만, 학교보안관 등의 자격을 강화하는 법안 1건만 지난해 6월 본회의를 통과했을 뿐 나머지는 긴 겨울잠에 빠져 있다. 국회의원들은 경쟁적으로 법안을 내놓기만 한 채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셈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학교폭력 가해학생은 2010년 1만9,949명에서 2012년 3만8,466명으로 급증하고 있다.
2011년 사회적 분노를 촉발시킨 가습기살균제 피해 문제도 마찬가지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는 제조사의 책임과 정부의 관리ㆍ감독 강화, 피해자들의 경제적 어려움 경감 등을 골자로 한 법안들이 잇따라 제출됐지만, 이들 법안의 처리는 백년하청이다. 특히 여야는 지난해 4월 임시국회 당시 본회의에서 198명의 찬성으로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결의안'을 통과시켜놓고도, 정작 올해 예산안 처리과정에선 기획재정부가 막판에 30억원의 유족조의금과 요양수당을 삭감한 사실조차도 몰랐다.
이처럼 시급을 요하는 법안들조차 여론의 주목도가 떨어지는 순간 정치권의 관심사에서 벗어나기 일쑤이고, 결국은 해당 의원의 임기 종료와 함께 자동폐기되는 일이 다반사다. 17대,18대 국회에서 자동폐기된 법안의 비율은 각각 47.7%, 43.9%에 달했다. 박대출 의원이 발의한 치매관련법만 해도 성윤환 전 의원이 18대 국회 당시 제출했다가 빛을 보지 못한 법안과 대동소이하다.
김성환기자 bluebird@hk.co.kr
허경주기자 fairyhk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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