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욕과 독선의 근친성은 조심스럽게 살펴야 할 문제다. 독선은 뚜렷한 악덕이지만, 금욕은 미덕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거기다 근면성이라는 선명한 미덕까지 한 덩이로 엮으려면 무모해 보일지 모른다. 그런데 실제론 두 미덕이 하나의 명백한 악덕, 즉 독선을 지탱하는 기둥일 때가 드물지 않다. 히틀러가 그러했고, 로베스피에르가 그러했고, 조선시대의 몇몇 유학자들이 그러했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가 장 칼뱅은 그 전형에 가까운 인물이었다고 한다.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칼뱅과 그에 저항한 인문주의자 세바스찬 카스텔리오의 생애를 소개한 책 에서 칼뱅을 피렌체 전제적 지배자이자 거의 전 유럽의 영주와 국왕 위에 군림한 영적인 독재자, 그리고 "악마적 근면성을 지닌 감각의 적대자"였다고 진단했다.
그가 전한 칼뱅의 일상 한 대목이다. "(칼뱅은) 일생 동안 자신의 육체를 엄격한 계율 아래 가두었고, 정신적인 것을 위해 최소한의 식사와 휴식만을 육체에 허용했다. 고작해야 서너 시간 잠을 자고(…) 단 한 번도 진짜 쾌락을 추구해본 적이 없었다. 칼뱅은 정신적인 것에 광적으로 헌신하면서 활동하고 생각하고 글 쓰고 일하고 싸웠을 뿐이며, 스스로의 삶은 단 한 시간도 살지 않았다." 이 금욕의 독재자는 자신의 무덤에 요란한 흔적을 못 남기게 유언, 죽어서까지 금욕을 실천했다.
그는 신민들에게도 가혹하리만치 엄격했다. 연극 춤 등 온갖 형태의 유희를 금했고, 머리 스타일, 옷 장식, 예식 요리의 가짓수를 규제했다. 약혼자라도 혼전에 교제한 사실이 드러나면 종교 재판을 받아야 했다. 찬송가를 부를 때도 "멜로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말씀의 정신과 뜻에만 정신을 집중하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말씀으로만 찬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감시와 밀고, 폭력과 테러가 횡행했다.
인간의 내면까지 장악하려던 그의 권력은 25살에 쓴 최초이자 완결적인 '종교개혁' 지침서 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할 은총을 내리셨다." 그의 독선은 저 신념 위에서 그토록 독실할 수 있었다. 츠바이크는 "이 위대한 광신자는 일생 동안 부드러운 화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칼뱅에게는 중간의 길이란 없었다. 단 하나의 길, 오직 자신의 길만이 있었다."
나는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보면서 츠바이크의 이 책을 떠올렸다. 칼뱅의 독선과 금욕과 근면성을 박 대통령의 면모와 포개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21세기의 한국 역시 칼뱅의 세상과 여러모로 판이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주장을 적당히 수용하거나 타협하는 것이 소통인가"라고 따지듯 반문할 때, "진정한 소통의 전제조건은 모두가 법을 존중하고 지키고, 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이 집행되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선언할 때, 청와대의 그 연단이 내겐 칼뱅이 섰던 생피에르 교회의 강연대와 겹쳐 보였다.
모든 선택을 '국민의 이익'으로 확신하는 어법은 모든 판단과 규율을 하나님의 계시로 치환했던 칼뱅의 그것과 닮아 보였고, 소통의 호소를 원칙의 이름으로 틀어쥐는 데서는 중간의 길을 부정하는 독선이 떠올랐다. 기자회견의 질의 응답조차 통제된 이벤트였다는 점도 씁쓸했다. 칼뱅 역시 어떤 이견에도 진지한 답변 없이 복종과 침묵을 요구했다. 국정교과서 부활 구상도 그런 대통령의 의중이 앞질러 배어 나온 것은 아닌지.
박 대통령은 사생활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관저에서도) 보고서를 보면서 장관, 수석 비서관과 수시로 통화도 하면서 이것 저것 결정하고 나면 어떤 때는 밤 늦은 시각이 된다.(…) 제 개인의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다." 나는 대통령의 그런 일상이 과연 미덕인지도 의문스럽다.
츠바이크는 칼뱅 이후의 역사를 근거로 칼뱅의 시대를 위로하고, 나는 위로 받는 느낌으로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역사에서 위안을 찾아야 하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다.
최윤필 기획취재부장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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