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오른쪽에서 났다면 화상 부위가 이렇게 왼편에 쏠려 있을 수가 없는데…."
2011년 12월 대검찰청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NDFC) 화재수사팀 강정기(42) 수사관은 산더미처럼 쌓인 수사기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맡은 것은 2002년 1월 경기 여주의 가정집에서 불이 나 네 살배기 아이가 숨진 사건. 범인으로 지목된 아버지 A씨는 "방에 휘발유를 뿌린 것은 맞지만, 아이에게 붓지 않았고 담배 피우려고 라이터를 켜는 순간 불이 났다"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강 수사관은 곧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 결론 내렸다.
아이는 당시 침대 밑에서 엎드려 숨진 채 발견됐다. A씨가 휘발유를 뿌렸다고 진술한 곳은 아이의 오른쪽. 강 수사관은 "화상은 왼쪽 머리와 팔 등에 집중돼 있었다. 침대가 화열을 차단했다는 걸 감안하면 A씨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결국 사건은 A씨가 동거녀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 아들에게 화가 나 머리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여 살해한 것으로 결론 났다. 법원은 A씨에게 징역 10년의 중형을 선고했고, 지난해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2002년 당시 형광등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종결됐던 사건이 재수사와 대검의 화재사건 감정을 통해 살해 사건으로 밝혀진 것이다.
대검 NDFC 화재수사팀은 최근 2년 동안 일선청의 화재수사를 지원한 경험을 토대로 수사지휘, 조사, 기소, 공판 등 각 단계에서 활용할 수 있는 화재사건 수사사례집을 발간했다고 12일 밝혔다. 사례집에는 A씨 사건처럼 뒤늦게 진실이 밝혀진 사건 등 7건이 실렸다.
2011년 6월 경찰관 B씨가 부인과 말다툼을 하다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붙여 살해한 사건도 있다. B씨는 "휘발유통을 던진 후 담배를 피우려고 했다"며 살인 혐의를 부인했지만, 수사팀은 실물 재연시험을 통해 피해자가 입은 전신 2, 3도 화상이 휘발유를 직접 몸에 부어야만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해 B씨의 유죄 판결을 받아냈다.
치과 의료기기 회사의 한 직원이 퇴사 요구에 격분해 창고에 불을 지른 사건에선 범인이 방화를 인정했으나 피해규모에서 주장이 엇갈렸다. 화재수사팀은 첨단 감정기법을 동원해 불에 탄 임플란트 기기가 34종 4만여개(시가 10억여원)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NDFC 관계자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으로 잿더미에 가려진 진실을 규명한 사례들"이라며 "앞으로도 화재수사팀은 화재의 원인은 물론이고 피의자의 고의와 과실 여부까지 종합적으로 판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력 부족은 풀어야 할 과제다. 2010년 1월 생긴 화재수사팀이 맡아 처리한 사건은 2011년 17건, 2012년 32건, 2013년 40건 등 매년 늘고 있지만, 수사팀 인력은 처음 그대로 강 수사관과 파견 온 소방관 2명이 전부다. 강 수사관은 "후배 수사관 중에도 화재수사팀에 오기를 원하는 이들이 많다"며 "수사관 인력이 보강되면 더 많은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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