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윤모(47)씨는 "그 남자가 있다"는 지인의 전화를 받고 서울의 한 술집으로 달려갔다. 한눈에도 2010년 떼인 돈 2억7,000여만원을 대신 받아준다며 착수금조로 6,000여만원을 뜯어간 뒤 종적을 감춘 A(54)씨가 분명했다. A씨는 윤씨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체포됐다.
하지만 바로 사법처리 될 것이란 윤씨의 예상은 빗나갔다. A씨는 서울, 전주, 부천, 광주로 사건을 이송시키며 7개월 넘게 수사를 피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10일 검찰과 경찰 등에 따르면 A씨는 체포 직후 앞서 체포영장이 발부된 서울 마포경찰서로 이송됐다. 경찰은 윤씨와의 대질신문 등 1차 조사를 마친 뒤 일단 A씨를 풀어줬다. 참고인 조사와 수표 추적 등 보강수사가 진행되자 A씨는 모친이 거주하는 전북 전주시로 사건 이송요청서를 냈다. 모친의 병세가 위중해 간호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마포경찰서는 보강수사 뒤 구속영장 신청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었으나 검찰이 이송 요청을 받아들이자 지난해 9월 12일 수사를 종결하고 서울서부지검으로 사건을 넘겼다. 같은 달 27일 전주지검으로 이송된 A씨는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다 10월 다시 자신의 주소지 관할인 인천지검 부천지청으로, 12월 초엔 광주지검으로 이송을 요청했다. 광주지검 관계자는 "A씨의 실제 거주지가 이쪽이라 우리에게 넘어왔다"며 "현재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2년 전 다른 사기 사건으로 A씨를 고소한 임모(52)씨도 A씨의 잦은 이송 요청으로 아직 고소인 조사조차 받지 못했다. 그는 "처음엔 의정부지검 고양지청이었는데 지난해 가을 주소지를 이유로 부천지청으로, 다시 전주지검으로 이송됐다"며 "A씨가 연락두절 되자 전주지검은 지난해 말 부천지청으로 사건을 되돌려 보낸 것으로 안다"고 했다. 피해자들은 서울에서 수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검찰에 다시 고소장을 제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해 검찰이 처리한 전체 사건 189만여건 중 이송 사건은 8만7,000여건(4.6%)이나 된다. 검찰은 형사소송법상 '토지관할'에 따라 수사를 해야 해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피고소인이 주소를 옮기거나 현 거주지 입증자료를 내면 이송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토지관할은 범죄지, 피고소인의 주소지나 실제 거주지이며, 법원 관할도 이에 따라 정해진다. 검찰 관계자는 "부당한 이송은 사무감사를 통한 시정조치 등의 방법으로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A씨가 이송 제도를 악용하는 게 분명한데 왜 이송 사유를 철저히 조사해서 막지 못하는지 속이 터진다"고 말했다.
김창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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