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는 천 개의 붓을 다 쓰고도 글씨가 안 된다고 했는데, 나는 어떻게 붓을 잡을까 싶습니다."
9년간 펜을 내려 놓았던 52년 시력(詩歷)의 이근배(74) 시인을 깨운 건 추사 김정희(1786~1856)였다. '국립박물관에 갔다가 / 추사의 벼루를 보았다 /…… / 추사가 먹을 갈아 시문을 짓고 / 행예(行隸)를 쓰던 유품이 아니라면 / 한눈에 들어올 것이 없는 / 그 돌덩이가 내 눈을 얼리고 / 내 숨을 멎게 한다'('추사를 훔치다')
시집 제목도 다. 시인은 사라져버린 시대의 전통과 아름다움을 벼루를 통해 되새기고 정철, 윤선도, 이황, 최치원 등 옛 위인들을 불러모은다. 그는 10일 기자간담회에서 "가장 한국적인 시가 위대한 시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낸 시인은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선비 정신을 이어받았다. 그 정신의 원류는 옛 선비와 대승들이다.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듯 / 펄펄 끓는 넋이 보입니다'('정몽주') '내 살아서 임금을 못 섬겼으니 / 죽어서 허리 굽은 소나무가 되어 / 장릉의 비바람을 막으리라'('성삼문')
시인은 결국엔 소멸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운명을 시로 드러낸다. '눈멀고 귀먹은 / 돌이라 살자 해도 / 티끌 목숨 끝에 / 매달리는 헛된 생각 / 풋 열매 익히지 못하고 / 이슬로나 지는 것.'('적멸') 고경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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