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나 자신도 놀랐다."
책의 첫 문장을 읽기도 전에 이런 낯간지러운 선언이라니. '재미없으면 환불해 주겠다는 건가' 하고 비아냥거리다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엔 베스트셀러 작가의 호언이 허언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미야베 미유키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미스터리ㆍ추리소설 작가로 꼽히며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 는 오로지 재미만을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인다. 밤이 새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책장을 덮으면 금세 증발하는 재미. 그렇지만 남우세스럽지 않은 화술로 엄밀한 재미를 주는 건 분명 흔치 않은 재능이다.
등으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VIP 대접을 받는 작가답게 이 소설은 어려운 각색 과정 없이도 바로 극화가 가능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범인이 설원의 스키장 한 켠에 무시무시한 생물병기 'K-55'를 숨기고 표식으로 나무에 곰 인형을 걸어두는 도입부부터 그렇다. 자신이 일하던 연구소에서 해고 당한 데 대한 보복으로 3억엔을 요구한 그는, 그러나 허무하게도 등장한 지 얼마 안 돼 교통사고로 숨진다.
보물찾기의 단서는 범인이 연구소에 보낸 몇 개의 사진 파일뿐. 만년 선임 연구원 구리바야시는 스노보드 마니아인 중학생 아들 슈토와 생화학병기를 찾아 나선다. 곰 인형 안에 발신기가 숨겨져 있어 수신기를 들고 가까이만 가면 금방 찾을 수 있는데, 광활한 스키장 한 구석에 있다는 게 문제다. K-55 도난 사건의 전말을 알고 이를 가로채려는 여자와 구리바야시를 돕는 구조요원 네즈와 스노보드 선수인 치아키, 우연히 곰 인형을 발견한 소년과 그의 친구들이 뒤엉키면서 스릴과 서스펜스도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소설의 뒷부분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잦은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싱겁게 끝난다 싶을 때면 한번 뒤틀어주고, 뻔하다 싶으면 다시 한번 허를 찌른다. 캐릭터에 충분히 동기를 부여하는 꼼꼼한 구성 덕에 계속되는 반전이 공허한 장치처럼 보이진 않는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문체가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재촉한다.
설원의 한기와 활강의 열기 한복판에 있는 듯 스키장 풍경 묘사가 생생하다. 일본에선 스키 시즌이 시작하는 11월 말 출간돼 일주일 만에 10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게이고의 작품 중에선 범작에 속하지만 오락성에 있어서는 엄지손가락을 들어줄 만하다.
고경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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