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우리 정부의 이산가족상봉 행사 제안을 사실상 거부한 북한 조국통일평화위원회 서기국 통지문을 보면 복잡한 속내가 읽혀진다. 특히 북측이 그간 우리측 제안이 탐탁지 않을 경우 강한 어조로 비난하던 것과 달리 "좋은 계절에 마주 앉을 수 있다"는 중의적 표현으로 완곡한 거부 의사와 함께 상봉 성사 여지를 남긴 부분이 그렇다.
북측은 "설은 계절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고려된다"고 밝혀 추위가 절정에 달하는 설을 전후한 시점이 상봉 시기로 부적절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실제 남북은 2001년 제3차 이산상봉(2월26~28일)을 제외하곤 고령의 이산가족을 감안해 되도록 겨울철 상봉을 피해 왔다. 더욱이 금강산을 고집하고 있는 게 북측 입장이고 보면 영하 수십 도까지 내려가는 곳에서 이산상봉은 무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측이 설 상봉을 거부한 진짜 이유는 "남측에서 다른 일이 벌어지는 것이 없고, 우리의 제안도 다같이 협의할 의사가 있다면"이란 전제에 담겨 있다는 분석이다. 북한이 지적한 '다른 일'은 2월 말부터 2주간 실시되는 키리졸브 한미 연례 합동훈련을 말한다. 조평통은 "곧 대규모 합동군사연습이 벌어진다"며 키리졸브를 직접 겨냥하기도 했다. 또 '북측의 제안'은 지난해 가을 무산된 금강산관광 재개 회담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 당국자는 "우리가 이산상봉 실무접촉을 제의한 전통문을 대한적십자사 총재 명의로 발송했는데 통일부 앞으로 답신을 한 것을 보면 행사 자체를 거부한 게 아니라 다른 메시지, 즉 금강산관광 재개 문제를 끌어들이고 싶은 속셈을 내보인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남측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금강산관광 재개도 논의하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이상상봉에 나설 수 있다는 의미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한이 굳이 날씨 얘기를 들먹인 것은 금강산관광에 대한 정부의 확고한 입장을 고려해 직접 언급해 봤자 실익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북측은 우리 정부의 진정성을 의심하며 상봉 거부를 정당화하는 행태도 보였다. 특히 "핵문제를 내들며 동문서답" "내부문제까지 왈가왈부" 등을 언급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비난했다. 박 대통령이 북핵의 완전한 폐기와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 체제의 불확실성을 강조한 마당에 이산상봉 제안을 순수한 의도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북한이 신년사를 통해 먼저 남북관계 개선을 촉구한데다, 이상상봉은 인도주의 성격을 띠고 있어 합리적 거부 명분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상봉 제안에 3일간이나 침묵하고 부드러운 표현을 쓴 점만 봐도 상당히 고심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북한이 이산상봉의 사전 준비 단계인 실무접촉 자체를 회피한 전례가 드물다는 점에서 북한 내부의 정치 현실을 거론하기도 한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장성택 숙청에 따른 체제 정비가 완비되지 않아 북한 지도부가 남북대화에 응할 여력이 부족할 것"이라며 "북측은 우리 정부가 금강산관광 등 남북관계 전반을 아우르는 고위급 회담 카드를 내밀지 않은 이상 당분간 정세를 관망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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