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언어는 사회 정치의 최일선에 있다. 말 한마디 때문에 법이 바뀌고 정치인이 공격을 받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우스갯소리로 '흑인'을 black people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흑인 자신들뿐이라는 말도 있다. 왜냐하면 백인이나 다른 인종이 'black' people라고 부르면 인종 차별적 어감을 주기 때문에 망설이는데 반해 흑인들은 자유롭게 사용하는 언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요즘엔 '흑인'을 African American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백인을 white people라고 부르면 아무도 반발하지 않는데 흑인을 black라고 부르려면 주위의 눈치를 살피고 조심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언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말조심이 앞서고 '듣기 좋게 말하기', '좋은 말로 말하기'가 표현법의 대안으로 떠오른다. '강간'을 '성폭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사건의 실체 묘사에 적합한 것인지 보다는 듣기 거북하지 않게 표현하는 언어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영어로는 rape라는 단어가 있는데도 sexual assault라고 표기하는 것은 언론에서 출발했고 일반인은 이런 용어를 할 수 없이 자주 접하게 된다. 좋게 말해 완곡한 표현법(euphemism)이지만 이런 방식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표현법'(double speak, double talk)을 낳기도 한다. 'Poor People'이라고 한다면 듣는 사람을 불쾌하게(offensive)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이럴 때는 그냥 '서민층(the underprivileged)'이라는 표현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고 이를 두고 'politically correct'라는 용어가 등장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살피고 말해야 하는 시대'를 말해주고 있다.
'접대비'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말이나 영어에서 모두 완곡어법이고 애매한 어법이기도 하다. 'Corporate entertainment', 'business entertainment' 등은 에둘러 말하는 것이고 듣기만 해서는 그 진짜 의미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중고생이나 이런 표현을 듣고 '접대'를 떠올리거나 그 진의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만큼 표현의 정확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업무상 상대해야 할 사람들을 'distant cousins'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방법으로 파생된 말이다. 완곡하게 에둘러 말하는 것이 좋은 경우도 분명히 있지만 그 표현법이 모호한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이중 의미의 애매한 말 double talk가 되고 만다. 언어 표현의 효율성과 사회 정치적 파장 사이에서 표현의 결과가 주는 비경제성은 여전히 논란거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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