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흙 같은 밤 휴전선 부근. 무언가 움직였는데 정체를 알 수 없다. 야간투시경은 가시거리가 제한적이고, 적외선 감시기는 동물과 사람을 구별하지 못한다. 첨단 장비를 이용한 군 현대화 추진 관계자들은 고민이 깊었다.
"게임기를 이용하죠"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세완의 고재관(39) 대표는 군측에 제안했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게임기 '엑스박스360'에 연결하는 주변장치 중에 사람의 동작을 인식하는 '키넥트'란 기기가 있다. 영상만 확인하는 CCTV와 달리 컬러영상은 물론이고, 적외선 감지기로 어둠 속 형체의 체적까지 분석해 사람과 동물을 구분한다. 체온과 심박수까지 측정할 정도까지 진화됐다.
고 대표는 키넥트를 이용한 휴전선 감시기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했고, 지난해 8월부터 이달까지 군에 납품돼 휴전선 일부 지역 비무장지대에 설치됐다. 비무장지대를 넘어오는 형체를 발견하면 사람과 동물을 식별, 사람이면 자동으로 해당 부대에 경보를 발령하는 시스템이다. 그는 "게임기가 국방의 주요 임무를 맡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고 말했다.
이 장치는 '창의성'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게임기기이지만 이를 휴전선에 응용하려고 한 것 자체가 '창의적 발상'이었다.
사실 고 대표는 모든 면에서 박근혜정부가 강조하는 '창조경제'컨셉트에 부합한다. '(스티브 잡스처럼) 세상을 바꿀 창의적 아이디어와 열정을 갖고 좋아하는 일에 도전해 어려움을 극복하는' 창조경제형 리더들이 필요하다는 게 박 대통령의 지론. 고졸 학력이지만 소프트웨어에 몰입해 맨손 창업을 했고, 각종 사회적 장벽과 편견을 넘어 세계적 전문가 반열에 오른 그의 히스토리 자체가 '창조경제형 리더'의 전형에 가깝다는 게 주변 평가다.
고 대표가 컴퓨터에 눈을 뜬 것은 열살 때. 하지만 가난했던 그에게 1984년 당시 자동차한대 값과 맞먹던 컴퓨터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는 나무로 직접 깎은 컴퓨터 자판을 만져보며 소프트웨어 개발책을 독학했다.
원래 꿈은 조종사였고, 고등학교도 인천 정석항공공업고로 진학했다. 항공기장비정비기능사 자격을 취득, 항공관련회사에 취직도 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에 이미 푹 빠진 그는 1년 만에 안정적 직장을 뛰쳐나와 프로그래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국내 대기업 계열사에 취업, 스마트폰 개발에도 참여했다. 여기서 야간대학과 대학원도 다녔다. 특히 남보다 앞서 모바일 시대를 주창하고 관련 책도 쓰면서, 인기강사반열에도 올랐다.
독학으로 이룬 것이지만 그의 전공은 동작인식분야. 국내에선 이미 독보적 존재로 꼽히고 있다. MS도 이런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해 전 세계 15명뿐인 최고기술전문가(MVP)로 선정했다. 국내에선 그가 유일하다.
그는 2011년 창업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아무리 전문가라도 벤처창업인이 된다는 건 가시밭길로 들어선다는 얘기다. 그는 요즘 그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전 세계 모든 공항이 활주로에 떨어진 이물질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작은 못 하나라도 있으면 대형 사고가 나는데 긴 활주로를 자동차로 달리며 보니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죠. 그래서 키넥트로 이물질을 자동 확인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공항관계자들이 다 환영하더군요. 하지만 회사규모가 작다 보니 정작 필요한 투자자들은 관심을 갖지 않아요."
창조경제를 향해 갈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다는 얘기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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