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새해 남북관계의 기조를 밝혔다. 내년이 남북분단 70주년이라는 점을 들어 "한반도 통일시대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며 상징성도 강조했다. 이를 위해 제시한 것이 ▦한반도 평화정착 ▦대북 인도적 지원 강화와 남북 주민간 동질성 회복 ▦국제적 통일공감대 확산 등 세가지다. 큰 틀에서 보면 현 정권의 대북정책 골격인 '한반도신뢰프로세스'와 다를 게 없다.
남북 이산가족상봉 재개를 제안한 것은 이런 측면에서 대북기조를 선제적이고 실질적인 조치로 이끌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보인다. 지난해 8월 이산가족상봉을 불발시킨 북한의 금강산관광 연계 주장에 대한 정부 입장이 빠진 것이 아쉽지만 정치색을 배제한 인도주의적 문제로 남북 물꼬를 트려는 시도는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신년사에서 한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화답일 수도 있다.
주목되는 건 남북 동질성 회복 발언이다. 박 대통령은 "남북이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아 생활방식이 너무 달라졌다.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민간교류를 확대하겠다"며 경험이 풍부한 유럽의 비정부기구(NGO)와 한국 NGO의 활동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이 말을 들으면서 떠오른 게 '공공외교'다. '다른 나라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정부 및 비정부기구의 외교'를 뜻하는 이 말은 정부나 당국자 간의 외교만으로는 소통과 교류를 끌어내는데 한계가 있다고 해서 민간과 비정부기구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개념이다. 말하자면 대외관계에서는 정부와 민간 모두가 주체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외교를 오래 전부터 가장 활발히 전개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냉전 때는 소련의 학생과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교육ㆍ연구 초청 프로그램으로 소련에 미국을 알렸고, 9ㆍ11 테러 여파로 중동과 미국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부시 행정부 때는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이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을 위해 공공외교를 강화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외교전략으로 내세운 '스마트파워'도 문화와 뉴미디어를 앞세운 공공외교였다. 냉전이 한창이던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서베를린에서 독일 국민에게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라고 한 연설이나 죽의 장막을 걷어 올린 미중의 '핑퐁외교'도 공공외교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북 사이에 이런 공공외교를 펼칠 여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공공외교가 가능하려면 당국간 대화 채널뿐 아니라 민간의 왕래가 실질적으로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쿠바에 미국 공공외교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외교관계 부재라는 이유 말고도 적성국가라는 데서 오는 민간 왕래의 단절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당과 군이 모든 것을 틀어쥐고 있고, 어떤 민간협력도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희생되는 북한에 우리의 공공외교가 들어갈 공간은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순하다. 김정은 정권의 통제력이 와해되지 않는 한 관련국들과의 공조 아래 당국 간 접촉면을 우선적으로 넓혀나가는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박 대통령이 통일시대의 기반 구축을 얘기하면서 "북핵이 핵심적인 장벽"이라고 언급한 것은 적절치 않았다. 지금까지 남북교류가 북한의 핵 도발 같은 안보위협으로 번번이 좌초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북핵이 남북관계 전반을 뒤흔드는 최대 불안요인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의 북핵 프레임에만 빠져있을 게 아니라 핵을 가진 북한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북한이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6자 회담의 전제로 비핵화의 진정성을 내세우며 압박과 제재를 가하는 미국의 대북정책도 이런 기조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미국처럼 핵 문제를 들어 뒷짐만 지면서 남북관계를 방치할 수는 없다. 박 대통령의 회견에서 부족했던 점은 어떻게 북핵을 극복해 통일시대를 이끌 것인지에 대한 성찰이 없었다는 것이다.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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