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여년 켜켜이 다진 계단식 논… 논두렁 총 길이만 만리장성의 10배세계 8대 불가사의 꼽기도… 순박한 토착민 마주하는 기쁨까지석회동굴 탐사·해변 트레킹 등 카가얀 밸리엔 즐길거리 가득휴양지와는 색다른 매력 발산
이 단어는 외워두는 것이 좋겠다. '인디저너스(Indigenous)'. '토착적'이라는 뜻이다. 필리핀 마닐라 이북의 내륙을 여행하게 되면 하루에 스무남은 번은 듣게 된다. 가이드의 입에서, 관료적인 공무원의 입에서, 허리에 권총을 찬 슈퍼마켓 점원의 입에서, 심지어 아는 영어 단어가 쉰 개나 될까 싶은 농부의 입에서도 이 단어가 굴러 나왔다. 대신 필리핀 여행에 으레 붙어 다니는 단어는 듣기 힘들었다. '트로피컬'이나 '이그조틱' 같은 나풀나풀한 것들 말이다. 그러니 이곳을 여행할 땐, 맥시드레스와 비치샌들 말고 밑창이 튼튼한 운동화를 챙길 것. 순박한 사람들이 오래된 삶의 방식을 지키며 사는 이곳은 루손섬의 북부, 아직은 낯선 필리핀의 속살이다.
필리핀은 13개의 지방구역(Region)과 여기 속하지 않는 3개의 특별구역 등 16개 구역으로 나뉜다. 우리의 광역 지방자치단체와 비슷한 개념이다. 지도를 보면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번호가 붙어 있다. 그래서 필리핀의 북쪽 모서리는 제1지방(일로코스)과 제2지방(카가얀 밸리), 그 사이 산악지대인 코르디예라 구역이다. 보라카이든 팔라완이든 세부든, 필리핀 여행은 마닐라에 도착해 남쪽 섬으로 향하는 비행기로 환승하는 것부터 시작하기 마련인데, 이번 여행은 반대로 북쪽으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면서 시작됐다. 위태로운 외줄다리 건너 숨어있는 토착민의 마을, 자욱한 안개에 묻힌 끝없는 계단식 논, 아직 다국적 자본에 점령당하지 않은 아름다운 해변이 거기에 있었다.
2,500년 전 농부들의 발길을 따라
지난달 중순, 마닐라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날아 제2지방 카가얀 밸리의 중심 도시인 뚜게가라오에 도착했다. 푹푹 찌는 마닐라와 달리 이곳 공기는 밤이면 제법 선선했다. 한국의 유월 초쯤 되는 날씨. 낮엔 볕을 피하게 되지만 저녁이 되자 그 볕에 달궈진, 왁자하고 조금은 무질서한 도시의 분위기가 무척 나른하게 느껴졌다. 동남아 여행의 매력은 이런 게 아닐까. 꽉꽉 여민 아귀를 일부러 조금 터 놓듯, 삶의 올을 잠깐 느슨히 풀어도 괜찮을 것 같은 느긋함, 혹은 나긋함. 온도계가 섭씨 18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열대의 저녁바람이 부드러웠다.
저녁식사 때 루손섬 내륙 원주민의 전통 공연을 봤다. 짧게 편집된 여러 부족의 전통춤이 이어졌다. 숟가락질하는 식탁 앞의 공연이란, 그게 훌륭할수록 우걱우걱 음식을 씹고 있는 게 미안해서 괜스레 불편하다. 이번에도 그랬다. 유독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한 건 적의 목을 잘라 창에 꽂아놓고 추는 호전적인 춤이었다. 그 춤은 정의의 뿌리가 본래 복수라는 진실을 강렬하게 일깨웠다. 그런 원초적인 몸짓 앞에 학습된 문명세계의 윤리체계는 무력하다. 대체 어떠한 삶과 세월이 저런 춤을 추게 만들었을까. 물어봤다. 이고롯족의 춤이라고 했다. 부족의 이름은 '산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란다. 이튿날 새벽, 그들이 왔다는 산을 향해 출발했다.
코르디예라. 이고롯족이 사는 최고 높이 2,922m의 아득한 산맥을 그렇게 부른다. 필리핀에 대해 갖고 있는 일반적 이미지-아마도 눈부신 해변과 비키니-와 가장 먼 풍경이 여기일 것이다. 물리적 거리도 멀다. 뚜게가라오에서 출발해 차로 3시간 반, 마닐라에서 온다면 족히 10시간은 잡아야 한다. 7,0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진 필리핀엔 엄청나게 다양한 종족이 뒤섞여 있다. 지금 쓰이는 언어만 170개가 넘는다. 깊은 삼림지대인 코르디예라에 처음 발을 디딘 건 까마득한 옛날, 말레이계 원주민 가운데 날래고 용맹한 종족이었다. 사냥감을 쫓아 도착한 산 속은 저지대와 달리 덥지 않고 선선했다. 산에선 늘 맑은 물이 솟았다. 농경과 수렵생활을 병행한 그들은 고민했을 것이다. 사냥감은 많으나 농사 지을 평지가 없는 산,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그들은 남았다. 그리고 결국 농토를 일궈냈다.
코르디예라가 바깥 세상에 알려진 건 1995년 이곳의 계단식 논(라이스 테라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다. 해발 1,000m 어름, 도저히 벼농사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60, 70도의 가파른 경사를 따라 끝없이 층층의 논이 자리잡고 있다. 논두렁의 총 연장은 2만 2,240㎞. 만리장성의 10배, 지구를 반 바퀴 도는 거리다. 계단식 논을 만든 건 이고롯족의 한 갈래인 이푸가오족으로 알려졌다. '이푸가오'는 '언덕의 사람들'이라는 뜻.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이푸가오족은 기원전 500년 무렵 산을 깎기 시작했다. 철기 문명이 도래하기 전이었다. 삽과 수레바퀴도 없이 나뭇가지, 소뼈를 이용해 흙을 파고 돌을 옮기고 축대를 쌓았다. 2,000년 넘게 계속된 그 지난한 노동의 결과는 지금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가이드북에 올라 있다.
찾아간 곳은 계단식 논 탐방의 중심지인 바나우에. 해발 1,200m에 위치한 소도시다. 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한 아침, 비탈에서 굽어본 계단식 논의 모습은 장대했다. 산자락 너머 어디선가 끓어 넘친 것 같은 구름이 층층의 논바닥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거대한 라이스 테라스를 다 덮지는 못했다. 짙은 비구름은 원근감을 희미하게 했는데, 그래서 거대한 논의 층계가 끌로 조각한 조각품 같아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봤다. 아무렇지 않은 무논이었다. 둑은 진흙으로 다졌다. 논 사이 공간이 뜬 곳은 대나무관으로 물길을 이었다. 아시아 어디서나 보는 계단식 논. 하지만 그 아무렇지 않음이 2,000년 동안 쌓이고 쌓여서 불가사의가 됐다. 코르디예라 계단식 논은 인간의 손으로 이룬 가장 끈질긴, 그래서 가장 위대한 구조물인 듯했다.
"20페소. 아히보제 세일이에요." 인공적으로 조성된 민속촌을 보러 떠난 일행을 벗어나 바나우에에 남아 마을을 산책했다. 출출해 바나나 한 송이와 도넛 한 봉지를 샀다. 값은 겨우 500원 정도. 남부 해변 휴양지 물가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다. 벼농사의 순서에 따라 12단계로 나뉘는 절기 중 찾아간 때는 '아히보제(모내기를 준비하는 시기)'였다. 논에 벼가 없어 관광객이 뜸한 시기다. 그래서 값을 깎아준다고 했다. 차를 한 잔 주문하고 가게 주인과 얘기를 나눴다. 토박이인 줄 알았는데 더 깊숙한 산에서 온 깔링가족의 사람이었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인간 사냥의 풍습이 남아 있던 부족이다. 죽은 이를 미라로 만들어 보존하는 까바얀족의 이야기, 한 곡을 다 부르는 데 4일이나 걸린다는 이푸가오족의 구전 가요 이야기… 일정이 짧아 가볼 수 없었던 토착 부족의 삶을 그 얘기를 통해서 짐작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전날 밤에 봤던, 그 강렬한 춤이 그의 조상들의 것이라고 했다. 옛날 부족의 일원이 살해 당하면 반드시 원수를 갚아 자른 목을 치켜들고 춤을 췄단다. 그렇게 말하는 말투가 잔인함과 멀었다. 오히려 어떤 책임감, 또는 윤리의식을 그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알 것 같았다. 이곳은 평생을 산줄기를 깎아야 한 줌 벼포기를 꽂을 땅을 얻을 수 있는 산비탈, 그리고 목숨을 바쳐서 그 땅을 지켜야만 했던 강인한 농부들의 대지, 코르디예라였다.
"모험은 끝나지 않을거야"
유독 벌레에 잘 물리는 체질이라 '벌레밥'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이걸 봤다면 아마 별명을 '개밥'으로 업그레이드 해줬을 것이다. 제1지방 카가얀 밸리의 북쪽 끝 산타아나에서 배를 타고 40분, 팔라우이 섬에 도착했다. 화산섬의 지형과 해안 토착민의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그런데 배에서 내리자마자 마주친 반가운 녀석들은 발 밑에서 바글바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집게(hermit crab)다. 사진으로만 보던 집게는 실물이 훨씬 귀여웠다. 소라껍질, 고둥껍질, 어떤 놈은 플라스틱 병두껑을 뒤집어 쓰고 고무락고무락 뒤뚱뒤뚱 산호 해변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수만 마리, 아니 수만 채의 이동식 주택을 클로즈업으로 촬영하려고 머리를 바닥에 대고 엎드렸다. 색색의 작고 예쁜 집들이 갸웃갸웃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즐거워 시간이 흐르는 걸 몰랐다. 한참 뒤 뒤통수가 촉촉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섬에 사는 개가 핥고 있었다.
환대(?)해준 개를 앞세우고 언덕을 올랐다. 가파른 언덕 위엔 19세기 스페인 사람들이 만든 등대가 있다. 등대를 세울 때 중국인들을 데려다 일을 시켰는데 근면한 그들도 가혹한 노동환경을 견뎌내지 못했다. 결국 원주민들의 피땀으로 필리핀의 북쪽 끝을 밝히는 불빛이 완성됐다. 이곳에서 보면 화산섬의 지형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제주도의 풍경과 놀랍도록 흡사하다. 팔라우이섬 전체와 섬을 둘러싼 바다는 1986년 보호구역으로 선포됐다. 오래 전 태풍에 지붕이 뜯기고 뼈대만 남은 등대의 모습이 처연했다. 옛 등대지기의 아들 파콜란씨에 따르면 1980년대까지 다섯 가족이 돌아가면서 손으로 등댓불을 회전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매년 2월부터 4월까지, 이곳은 관광객으로 북적이게 된다. 떼지어 이동하는 혹등고래를 여기서 관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섬의 남쪽 끝에서 이곳까지 오는 트레킹 코스가 해안과 숲을 따라 개발돼 있다. 가이드는 모두 140가구가 사는 섬의 주민들. 무척 수줍음이 많다. 하지만 돈의 때를 덜 탄 만큼 친절하고 순박한 사람들이다. 산타아나를 마주보는 섬의 남쪽 끝부터 등대까지 최장 왕복 8시간의 코스가 있다. 3월 즈음, 때를 잘 맞춰 간다면 돌사타라는 특산 꿀을 채취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도 있다. 벌 종류 가운데 가장 크고 사나운 '애피스 돌사타'라는 벌의 꿀이다. 1,000여 명의 주민 가운데 현재 꿀을 수확하는 능력을 지닌 '허니 헌터'는 32명밖에 없단다. 나무와 절벽을 기어올라 연기로 벌을 쫓아내고 꿀을 채취하는 일이 그만큼 위험하고 힘들다.
제법 규모 있는 도시인 뚜게가라오는 석회지대 사이로 흐르는 카가얀강의 중류에 있다. 이곳엔 300개가 넘는 석회 동굴계(系)가 있다. 지하세계를 꿈꾸는 진지한 탐험가들의 파라다이스다. 여행자들이 흔히 찾아가는 곳은 신도석과 제단을 갖춘 예배당 등 7개의 방이 있는 깔라오 동굴과 험한 코스로 유명한 시에라 동굴이다. 이밖에 아직 끝까지 탐사가 이뤄지지 않은 끝없이 긴 오데사 동굴, 지하수 폭포가 있는 블루워터 동굴 등도 있다. 한국의 동굴 같은 안내 조명과 데크를 기대하지 말 것. 미끄러지고 부딪히고 빠지고, 어쩌면 갇힐 각오를 해야 한다. 진짜 암흑 세계 속으로의 트레킹을 기대한다면 그만큼 신이 날 것이다. 깔라오 동굴에서 나와 보트를 타고 피나까나우안강을 15분 정도 거슬러 오르면, 저녁마다 수만 마리의 박쥐떼가 동굴을 빠져 나와 날아오르는 장관을 목격할 수도 있다.
해변과 동굴 외에도 카가얀 밸리에는 즐길 거리가 가득하다. 이 지방의 안내책자 표지에 적힌 문구가 그래서 '모험은 끝나지 않을 거야(Adventure never ends)'. 루손섬 북부는 통째로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관광 인프라다. 관광보다 농업이 산업의 중심인 지역이라서 럭셔리 리조트가 즐비한 남쪽에 비해 불편하고, 촌스럽고, '릴랙스'하기엔 뭔가 부족할 것 같다. 사실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너도나도 해변과 스쿠버다이빙과 카지노의 기억만 안고 돌아오는 필리핀 여행에서, 색다름을 기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최고급 휴양시설을 나오자마자 가난한 현지민의 삶을 마주쳐야 하는 동남아 여행이 어딘가 불편했다면, 이곳 루손섬의 북부가 대안이 될 듯. 토착민들과 어울려, 동남아시아의 진짜 매력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수첩
●시차는 한국과 1시간, 한국이 정오일 때 필리핀은 오전 11시다. 화폐는 필리핀 페소. 1페소에 약 27원. 마닐라 공항을 이용할 때 공항세 550페소를 내야 한다. 필리핀항공과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이 매일 인천과 마닐라 간 직항편을 운항한다. 카가얀밸리의 랄로시에 올해 국제공항이 개항할 예정이다. ●필리핀 여행 최다 항공권을 보유한 온필(www.onfill.com)을 이용할 경우 최대 60% 할인을 받을 수 있는 쿠폰을 준다. 필리핀항공 카운터에서 수령하거나 웹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보라카이, 세부, 마닐라에 자유여행객의 편의를 위한 온필라운지도 운영 중이다. 1588-0008 ●마닐라 공항 바로 옆에 24시간 복합 레저 단지인 '리조트 월드 마닐라'가 최근 문을 열었다. 호텔, 다양한 레스토랑, 쇼핑시설, 카지노 등을 갖추고 있다. 한국어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한국사무소 (02)733-9036 ●루손섬 북부는 저지대와 산악지대의 기후가 확연히 나뉜다. 저지대는 전형적인 몬순 기후이지만 산악지대(코르디예라)는 겨울철 기온이 섭씨 10도 밑으로 떨어진다. 12~4월이 건기, 6~10월은 우기다. 산악지대 토착민들의 마을을 방문할 땐 반드시 현지인 가이드와 동행해야 한다. 필리핀관광청 www.7107.co.kr (02)598-2290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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