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와 Y는 미리 만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나도 주문을 해야 했는데, 매장이 넓고 붐비는 터라 종업원을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저기요, 저기요, 하는 내 목소리는 음악과 수다 속에 묻혀 버렸다. 그러자 Y가 말했다. "제가 불러드릴게요." 그녀는 빙긋 웃더니 손을 번쩍 들며 '재규어!'라고 크게 외쳤다. 드디어 이쪽을 돌아보는 종업원이 있었다. "이렇게 정신 없을 땐 '저기요'나 '재규어'나 비슷하게 들리잖아요." 한참 후 잔이 비었다. 다시 장난기가 동한 Y는, 이번엔 손나팔을 만들어 입에 대고 이렇게 외쳤다. "자기야!" 역시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 다가왔다. Y는 깔깔 웃었다. "저기요. 자기야. 재규어. 다 똑같이 들리나 봐." 맥주 때문인지 Y의 재치 때문인지 우리는 조금씩 기분이 좋아졌고, 다시 빈 잔을 채우기로 했다. "이번엔 내가 해볼게." 나는 Y처럼, 하지만 Y만큼 씩씩하지는 않게, '자기야!'라고 주방 쪽을 향해 소리쳤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밤이 깊어 이미 손님들이 많이 빠져나간 뒤라 나의 발음은 '저기요'로 뭉개지는 대신 너무도 명확하게 '자기야'로 들린 것이다. 고개를 돌려 우리 쪽을 바라본 사람은 종업원이 아니라 저 건너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였다. 여자와 다정하게 나란히 앉아 있던 남자. 남자는 누가 자기를 '자기야!'라고 불렀다고 생각한 것일까. 당황하여 딴청을 부리는 나를 대신해 얼른 Y가 다시 나섰다. "저기요!"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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