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금융위기가 터지고 5년 남짓 지났지만 세계경제가 여전히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은행이 파산하거나 외화가 부족해 국제사회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경우 평균적으로 5년이면 경제가 이전 궤도로 되돌아간다. 그렇지만 지금은 위기가 발생하고 5년이 지났는데도 미국 중앙은행이 고작 채권매입 규모를 줄이면서 정책 정상화를 시작했을 뿐이다.
사실 이 조치는 미국경제의 회복을 알리는 신호여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그런데 전혀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그간 미국경제의 회복속도가 만족스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장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한 신흥국에 미칠 영향까지 염려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만이 아니다. 개도국의 트레이드 마크인줄 알았던 '국가부도' 위기에 몰렸던 유럽 선진국들은 이제야 겨우 부진의 늪에서 탈출할 동아줄을 잡은 정도다. 미약하나마 선진국이 회복의 가닥을 잡아나가고 있지만 신흥국 경제는 오히려 감속 중이다. '8% 성장률'이라는 중국의 마지노선은 허무하게 무너졌고, 환대 받던 인도 브라질 등 신흥국도 예전 같지 못하다. 2014년 세계경제는 '느릿느릿한 회복'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신중한 미국의 통화정책 정상화
지난해 1.7%의 성장률을 보였던 미국경제는 올해도 2% 중반의 견조한 성장세를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저금리 등 각종 정책 덕분에 가계의 재무건전성이 회복되고, 주택가격도 반등하면서 장기적인 성장 추세를 어느 정도 회복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간 경기 회복의 발목을 잡아왔던 미국 정치의 갈등도 점차 해소되고 있다.
남은 이슈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출구전략이다. 지난달 18일 연준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2014년 1월부터 자산매입 규모를 월 850억 달러에서 750억 달러로 축소한다고 발표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5년 넘도록 이어온 연준의 통화완화 정책이 출구를 향해 방향을 튼 것이다. 버냉키 의장이 퇴임 전에 출구 전략을 개시한 것은 결자해지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후임 재닛 옐런의 부담을 줄였다는 분석도 있다. 규모를 볼 때는 신중한 출발로 평가할 수 있다.
막대한 규모의 달러를 공급한 양적완화 시작단계에서부터 이미 나왔던 것이지만 출구전략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당장 미국 경제지표 개선 소식에 오히려 세계 주가가 하락하고, 미 연준 의장의 한 마디에 몇몇 신흥국에서 대규모 자본 유출이 발생했다. 가장 큰 걱정은 유동성이 줄어드는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푼 돈은 3조 달러(연준 자산 기준)로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20%에 육박한다.
불가피한 정책이었지만 자산버블이 생기고 물가가 치솟는 부작용이 발생하기 전에, 그러면서도 경기회복세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유동성을 흡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출구전략 구사는 쉽지 않은 일이다. 출구전략은 사전에 정해진 순서를 기계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라기 보다 경제상황에 따라 유동적이 될 것이다. 우선 미국의 경기회복 속도에 좌우될 것이며 신흥국 상황도 주요 변수다. 버냉키 의장이 신흥국 경제 여건을 예의 주시할 것이라고 밝힌 것도 그런 맥락이다.
현재 예상으로 미 연준은 올해 하반기에 추가 자산매입을 중단할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금리인상 논의를 본격화할 것이다. 지난달 FOMC 발표에 따르면 2014년 4분기(10~12월) 미국 실업률은 6.5% 전후까지 하락할 전망이어서, 금리인상은 서두른다면 2015년 상반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연준의 신중한 행보를 고려할 때 실업률만이 금리인상의 유일한 잣대는 아니다. 장기적인 물가상승률, 노동시장 참가율이나 고용의 질 등 다른 여러 경제지표를 동시에 고려해 금리인상을 서두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유럽은 느릿한 성장회복
유로존은 지난해 2분기 이후의 경기회복 흐름이 내년까지 이어지나 성장률은 1% 남짓에 그칠 것이다. 일부 국가를 중심으로 물가하락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금융기관의 대출축소, 디플레이션과 자산가격 하락 등 버블붕괴기 일본에서 나타난 현상들이 재현되고 있다.
그렇지만 물가하락은 환율을 대신하는 경상수지 메커니즘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도 있다. 사실 남유럽 국가는 이제 거의 경상수지 균형을 맞추고 있다. 이들 국가의 경상수지 균형은 임금 및 가격하락으로 기업들이 경쟁력을 어느 정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따라 국가신뢰위기가 다소 완화하면서 소비 및 투자심리도 점차 호전될 것으로 보인다. 독일은 대연정 구성으로 재정긴축의 강도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중앙은행(ECB)의 최근 금리 인하에서도 보듯 전반적인 물가압력 하락으로 성장을 중시하는 정책기조가 강화될 전망이다.
그러나 회복속도가 빠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남유럽 국가들은 경상수지가 호전되긴 했지만 경제를 끌고 나갈만한 이렇다 할 주도 부문이 없다. 저성장이 길어질 ?있다는 이야기다. 유로존의 금융부문 부실도 성장의 걸림돌이 될 우려가 있다. 올해 안에 단일 은행감독체제 출범에 합의하기는 했지만, 은행 단일정리체제 및 부실정리기금 등은 각국에 적지 않은 재정부담을 주기 때문에 합의가 순탄치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선순환 가능할까
대규모 금융완화와 재정확대를 앞세운 아베노믹스에 힘입어 지난해 일본경제는 회복세였다. 올해도 1%대 중반 수준의 성장세가 예상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회복은 효과가 단기적일 수 밖에 없는 재정과 통화 정책에 기댄 부분이 크다. 본격적인 회복을 위해서는 기업의 이익 증가가 투자 및 민간소비로 이어지는 선순환으로 나타나느냐가 관건이다. 당장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어도 규제완화 및 투자 활성화 등 중기적 성장전략을 착실히 준비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경제의 완만한 성장을 위협하는 위험 요인이 여럿 있다. 우선 4월에 소비세가 5%에서 8%로 인상됨에 따라 소비심리가 급격히 위축될 위험이 있다. 일본 정부는 추경예산을 집행하여 소비세 인상의 충격을 흡수하려 하겠지만, 엔저로 오르는 물가를 일본 기업의 임금인상이 따라가지 못할 것으로 보여 소비 여력은 크게 확대되기 어려울 수 있다. 재정 확대 정책이 한계에 부닥칠 위험도 있다. 지난해 일본은 실질성장률 가운데 공공수요에 의한 성장기여율이 계속 높아져 왔다. 그러나 GDP의 230%를 넘는 막대한 국가채무를 고려할 때 더 이상 재정을 확대하기는 어렵다.
금융완화 정책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중앙은행은 본원통화를 올해 말까지 두 배로 늘릴 계획이다. 그러나 물가상승세가 확대될 경우 악성 인플레이션이나 일본 국채의 신뢰도 하락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점차 커질 수 있다. 최악의 경우, 디플레이션 탈출을 목표로 한 아베노믹스가 물가 상승 때문에 국가부도 위험이라는 커다란 실패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난해 엔저에도 불구하고 일본 수출산업의 상황이 크게 개선되지 못한 상황에서 금융완화 정책을 축소하는 것도 쉽지 않다. 수출 경기 개선은 더디고 금융완화 정책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 정책 자체가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
한 단계 낮아진 중국성장
올해 중국 경제는 7.4% 안팎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요한 것은 중국 정부가 경기둔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이다. 올해 경제 운영의 윤곽이 드러난 지난해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 중국 정부는 수년째 반복하고 있는 '안정적인 성장 추구'라는 기조 하에 "경제 발전의 질과 효과를 제고하고 후유증이 없는 속도를 유지한다"는 원칙을 되풀이했다. 어느 정도의 성장 둔화는 용인할 것이며 성장률이 급락하지 않는 한 경기 부양책을 내놓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중국 정부는 원활한 일자리 창출을 보장하는 성장률 하한을 7% 중반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연간 1,000만 명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할 수만 있다면 경기부양에는 나서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경기부양이 그 동안 강력히 억제해온 투기 부문으로의 자금 이동을 허용한다는 그릇된 신호를 줄 것이라고 중국 정부는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통화량을 '온건하게' 관리하는 한편 시중자금을 부동산, 인프라 부문에서 서비스업, 중소기업, 삼농(三農·농업 농촌 농민) 부문으로 배분하겠다고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현재 중국 경제가 안고 있는 가장 큰 위험 요인은 지방정부의 부채 문제다. 낮은 투자 수익률, 투자수익 회수와 대출자금 상환간 만기 불일치 등의 문제가 중첩되면서 일부 지방정부는 파산 위기에 직면해 있다. 경제공작보고에서 별도의 항목으로 이 문제를 다룰 정도로 지방정부 부채 구조조정에 대한 중앙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다.
또 하나의 뇌관은 부동산 문제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초 '부동산 매매차익에 대한 20% 소득세 부과' 조치 이후 추가 조치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선전 같은 1선도시를 중심으로 주택과 토지 가격 오름세가 이어지자 10월부터 지방정부를 앞세워 대응에 나서기 시작했다. 주택 구매 관련 대출 억제, 추가 주택 구매 자격요건 강화, 서민주택 공급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주택 가격 규제를 잇달아 발표했다. 중앙정부가 부동산 시장 규제에서 한 발 물러난 것은 부동산 시장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자칫 전체 경기가 급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버틸 여력 있는 신흥국
선진국 금융위기에 아랑곳하지 않았던 신흥국 경제는 지난해 취약성을 드러내며 크게 흔들렸다. 미 연준의 양적완화 축소에 대한 우려가 시발점이었지만 신흥국 경제는 이미 이전부터 약한 모습을 보여 왔다. 가장 큰 문제는 경상수지 적자가 커졌다는 점이다. 2008년 이후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 대부분의 신흥국은 수출경기 둔화에 대응해 금리를 낮추고 재정을 풀었다. 선진국의 경기회복을 기다리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에서 국가부채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기다리던 수출수요 증가는 요원했다. 양적완화의 부작용으로 선진국에서 신흥국으로 자금이 몰려들었다. 내수활성화 정책과 상대적으로 미약한 수출증가는 결국 경상수지 적자로 이어졌다. 물가상승과 자산가격의 상승은 당연한 순서였다.
올해에도 신흥국의 이런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에너지 및 자원 효율이 높은데다 서비스업 비중이 높은 선진국의 경기회복이 중국의 경기둔화를 상쇄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금리나 재정 등 정책 수단에 여유가 있는 편도 아니다. 이미 대부분의 국가에서 실질금리는 낮으며 저금리로 풀린 유동성으로 자산거품 우려가 있고 재정적자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브라질, 인도는 자금유출을 걱정해 금리를 올려야 할 상황에 놓여있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는 신흥국 금융시장에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미국의 채권매입 중단 검토만으로 흔들렸듯 미국 금리 인상이라는 단어만으로 또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비관적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난해 신흥국은 주가와 통화가치가 10% 이상 하락하는 상황에서도 구제금융을 받은 국가가 없다. 미국발 고금리에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졌던 1980년대 초반 중남미나 1990년대 중반 멕시코와 다르다. 과거에 비해 외환보유액을 신중하게 운용하고 그 규모도 작지 않다. 거시경제정책이 과거에 비해 신중한 점도 긍정적인 요인이다.
금융 변수 변동성 커질 듯
올해 세계경제는 전체적으로 3% 중반의 완만한 회복세를 보일 전망이다. 희망적인 것은 금융위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최근 5, 6년 사이 정책적 불확실성이 가장 낮다는 점이다. 국가부채와 의료보장체계를 두고 벌어졌던 미국정치의 파행이나 구제금융의 규모와 시기에 대한 유럽 각국간 갑론을박은 올해를 기점으로 잦아들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에 성장 탄력이 떨어졌던 중국, 인도, 브라질 등 신흥국 경제는 여전히 취약한 부분이 있지만 거시경제 정책에 큰 무리가 없는 편이다. 이미 시작된 미 연준의 출구전략으로 각국의 금리는 상승세를 보일 것이고 그에 따라 환율, 주가, 금 등의 금융 변수들은 변동성이 커질 것이다.
정성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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