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을 훌쩍 넘긴 연극계의 거장이지만 연출가 오태석(74)의 옷에는 안락의 흔적 대신 톱밥과 먼지가 잔뜩 묻어있다. 권위를 쥐고 있을 것 같은 손에는 대신 망치가 들려있다. 그가 이끄는 극단 '목화'의 창단 30주년을 맞아 10년 만에 무대(대학로 스타시티)에 올리는 연극 '자전거' (오태석 작ㆍ연출, 5일~2월2일). 오태석은 객석 귀퉁이에 앉아 새로 꾸미는 '자전거' 무대를 쉼 없이 매만지고 두드리며 배우들을 독려한다.
1984년 문을 연 '목화'를 통해 지난 30년 동안 우리 소리, 우리 몸짓을 꾸준히 사회참여적 연극언어로 발전시켰던 오태석은 '목화'는 물론 한국 현대 연극의 산 증인이다. 그는 '세월을 까먹어온' 연극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지만 대학 졸업 후 50여 년 동안 60여 편의 작품을 국내ㆍ외 무대에 올리고 영어, 일어, 불어, 중국어, 폴란드어 등으로 번역된 20여 개의 희곡집을 내는 등 인생의 편린을 연극이라는 이름의 아교로 빈틈없이 이어 붙인 장인이다.
그가 말하는 30주년 기념 연극으로서 '자전거'가 갖는 의미는 민족의 아픔, 더불어 우리 사회가 고통받는 현실에 대한 뒤돌아봄이다. 1983년 초연 후 84년과 87년 그리고 2004년 공연됐다가 이번에 다시 무대에 오르는 '자전거'는 한국전쟁의 기억과 한센병 환자로 상징되는 우리 민족의 어두운 수난에 대한 이야기다.
"올해는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입니다. 세계대전은 끝났으나 우리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민족상잔을 겪었고. 전쟁과 우리 세대의 아픔, 여전히 남북을 비무장지대(DMZ)가 가로막고 서로 불행한 시간을 이어가고 있지요. '목화' 30주년은 그냥 뭐 그런 것이고. 왜 우리는 아직 안 좋은 시간을 가져야 하는지, 이런 의미를 나누기에 좋은 작품('자전거')인 것이지요. 그래도 별로 하기 싫어요. (상처를) 들춰내자니, 아프잖아."
'목화'는 30주년을 기념해 '자전거'에 이어 오태석이 만든 여러 레퍼토리 연극을 줄줄이 공연할 계획이다. "'자전거'에 이어 연극 '봄봄'을 올리고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이니까 '템페스트'도 공연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10월엔 국립한글박물관이 문을 여니까 이에 맞춰 '아리랑'을 공연하고 연말엔 뉴욕 라마마 극장에서 '템페스트'를 할 예정이지요. 사실 작년에 DMZ에 관한 이야기를 (연극으로) 했어야 하는데 바빠서 못했고, 올해엔 우리는 왜 (전쟁과 폭력의) 아픔을 끌어안고 사는지 젊은 세대에게 알리고 보여주고 싶어요. 정치권이나 힘 있는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는 현실도 마찬가지로 알리고."
'목화'는 연극은 물론 영화계와 대중문화 전반을 대표하는 주요 배우들을 배출한 산실이다. 김병옥, 김병춘, 박희순, 성지루, 장영남, 정은표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야말로 '목화'의 가장 큰 자산이다. 이들이 '목화'의 3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를 만든다면 연극 팬들에겐 적지 않은 즐거움일 것이다. "바람직하긴 한데, 다 바쁘니까 따로 계획해서 무대화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 대신 레퍼토리 무대 연습을 같이 하고 참여하는 방법이 있긴 한데 잘 모르겠어요."
껍데기는 딱딱하지만 속은 무엇보다 부드러운 목화. 겉과 속이 끝없이 갈등하는 목화의 성질은 세상의 그것과 너무 닮았다. 그래서 '목화'의 작품은 우리 전통극의 형식을 활용하면서도 하나같이 갈등하는 현대 사회의 문제를 촘촘히 다룬다. 극의 여백을 충분히 두고 나머지는 객석이 완성토록 하는 비약과 즉흥적인 구성도 '목화'의 특징들이다. "사람에겐 자기가 궁리해야 하는 머리가 있어요. 이 머리는 휴대폰 쳐다보고 파티하며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는 식으론 채워지지도 않고 사용할 수도 없어요. 이 머리를 쓰도록 해주는 게 연극이지요. 폐쇄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의 얘기에 집중하고 공통된 공기를 숨 쉬도록 만드는 연극은 적당히 비워져 있어야 하고 생략돼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관객이 그 머리를 써서 자기들 것으로 꾸미지요. 생략된 부분을 관객이 채울 것이란 믿음, 이 믿음 때문에 수십 년 동안 이 지랄을 하는 거지."
연극이란 '허구'의 세계를 살아내기 위해 공연이 없을 때에도 끊임없이 연습하고 작품을 써내는 그는 '자전거' 무대를 준비하면서도 창작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육필로 적은 원고를 단원 한 명이 컴퓨터 파일로 옮기는 중이다. "30주년이라 쓰고 있는데, 내용은 뭐 이제 나이 처먹어서 하는 덕담 같은 거지요. 놀부가 흥부 괴롭혀도 결국 둘이 우애를 찾잖아요. 이런 비슷한 얘기라고 보면 됩니다.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는데 무대엔 언제 올릴지 확실히 모르지요. 자, 담배 피우고 해, 못 피우는 사람들 사탕 잡수세요."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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