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뜨는 해가 우리를 배신하지 않고 부지런히 뜨고 또 떠줘서 2014년 새해를 맞이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해의 뜨고 짐은 별 다를 것 없는 반복 같아도, 사실 매번 그 일어남이 놀라운 새로운 사건이다. 가령 어느 날 해가 뜨거나 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일상의 반복이 얼마만큼 귀하고 경이로운 우주적 사건이었는지 뒤늦게 깨달을 것이다. 다행히 그런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고 무사히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는 데 감사한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당연한 일들, 익숙해진 사람들, 특별할 것도 없고 놀랍지도 않은 주변들에 새삼 안녕을 묻고, 존재가치를 밝혀주는 것도 좋겠다.
이런 얘기를 하자니 문득 미술의 한 사례가 떠오른다. '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그토록 매력적으로 만드는가?' 어디선가 대체 이 뜬금없이 긴 질문은 뭐란 말인지 되묻는 소리가 들리는데, 간단히 답하면 1956년 제작된 어느 미술작품 제목이다. 앤디 워홀에 가려 덜 알려진 팝아트의 진짜 시초, 영국미술가 리처드 해밀턴이 잡지 광고 속 TV나 진공청소기 같은 상품 사진, 가판대 만화의 한 컷 등을 오려 붙여서 만든 콜라주 작품의 이름이란 말이다. 이미지를 찾아보면 알겠지만, 그 작품은 오늘의 눈으로 보면 꽤나 소박하다. 하지만 당시 서구 대중의 마음을 꿈틀거리게 한 중산층 가정의 물질적 이상이 작가의 사진 합성 기법을 통해 탁월하고 예리하게 묘파된 수작이다. 배우 뺨치는 외모의 남녀가 잡일은 가사도우미에게 맡기고, 첨단 가전기기들, 사치스런 가구 및 독특한 취향을 과시할 수 있는 인테리어 소품에 둘러싸인 채 유유자적해 하는 삶. 은밀한 로맨스와 기분전환용 대중오락과 우주를 향한 동경을 내 집 거실에서 폭죽 터트리듯 한데 발산시킬 수 있는 삶. 해밀턴은 그런 지극히 세속적이면서도 그토록 색다르고, 그토록 매력적인 인생을 좇는 중산층 이하 삶의 욕망을 현실의 이미지 파편들로부터 종합해냈다. 그렇게 해서 순수미술의 고귀한 지위를 대중문화에 동석시키고, 추상미술의 무거운 미학을 팝아트의 경조부박한 미감으로 치환시키는 현대미술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어냈다.
여기서 보통은 해밀턴과 그의 작품이 지닌 의미가 일상의 보잘것없는 현상들에 주목해 가치가 크고 의의가 깊은 미술사적 과제를 촉발해낸 점이라고 추측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더 주목하는 점은 그의 작품 제목이 은근히 걸고넘어지듯이, 대체 우리의 가정과 색다름 또는 매력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이다. 아니, 우리의 가정생활조차 색달라져야 하고 매력적이어야 하는 이유, 그런 정체 없는 압력에 밀려 삶의 외관을 그럴듯한 물질들로 급격히 변화시킨들 과연 우리가 내밀한 행복과 안녕을 얻을 수 있겠냐는 의문이다. 당시는 구소련과 미국이 대표하는 동서 냉전 체제로 세계가 위태위태했으며, 양자의 과열경쟁으로 군사력부터 주방기구까지 정치적 선전도구가 되던 때다. 그런 때 해밀턴은 유행상품 이미지를 합성한 자신의 콜라주 작품 이면에서 '오늘날의 가정을 색다르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 혹 정치역학의 전략은 아닌지, 그 경우 멋져 보이는 당신과 당신의 가정은 정말 안녕한 것인지 물었으리라. 평범하고 별스럽지 않은 차원의 안녕이 과연 전시성 정치와 힘의 이데올로기가 설계한 가시적 효과로 확보되는 것인지 의심했으리라.
얼마 전 한 대학생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소박한 질문을 담은 대자보로 우리 사회에 강렬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 질문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사적 안녕 때문에 눈감았던 현실의 구조적 문제들을 환기시키고, 모두가 함께 하는 구체적 실천들 속에서 새로운 안녕을 만들어나가자는 의지를 자극했다. 그리고 2년간 이 지면에 글을 썼던 내게는 매일의 삶이 당연하게 보장되지 않고, 내일의 계획이 쉽게 뒤틀리고, 사람들 관계가 이상하리만치 깨져나가는 원인이 대체 어디 있는지 깊이 공부하라고 등 떠밀었다. 이제 새로운 '삶과 문화'에 대한 사고를 약속하며, 부디 안녕들 하시라는 인사로 끝을 맺는다.
강수미 미술평론가 ㆍ동덕여대 회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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