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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1월 2일] 폭설

입력
2014.01.01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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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청량리역에서 춘천행 열차를 탔다. 후끈거리는 실내 공기가 나른함을 불러왔다.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가까이 내리는 눈은 빠른데 멀리서 내리는 눈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멀리서 내리는 눈을 보았다.

어느 해 폭설이 내린 밤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청량리행 열차에 올랐다. 역 앞 포장마차에서 마신 술기운 때문에 자리에 앉자마자 잠들었다. 갈증과 후덥지근한 공기 때문에 눈이 뜨였다. 열차가 정차해 있었다. 성에를 걷어내고 역 이름을 확인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빽빽한 승객들 틈을 헤치고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하숙집에 가고 싶었다. 역 앞의 풍경과 거리 풍경이 예전 그대로였다. 건널목을 건너 벽돌공장이 늘어선 길을 걸었다. 벽돌공장 담이 끝나자 구멍가게가 보였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소주 한 병을 사기로 했다. 잠긴 구멍가게 문을 두드려 주인을 깨웠다. 주인아주머니와 아들이지 싶은 청년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소줏값을 지불하기 위해 지갑을 찾았지만 점퍼 주머니 어디에도 지갑이 없었다. 아주머니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내가 내린 역은 중앙선에 있었고 내가 내렸어야 할 역은 경부선에 있었다. 나는 빈털터리가 되어 폭설에 묻히고 있었다.

역을 향해 하염없이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불빛이 비쳤다. 모터사이클 한 대가 다가왔다. 모터사이클은 내 옆구리에 와서 고장 난 듯이 멈췄다. 구멍가게에서 봤던 그 청년이었다. "방이 하나라서…, 이걸로 차비라도 하세요"라며 5,000원짜리 지폐를 점퍼 주머니에 꾹 찔렀다. 나는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그대로 서 있었다.

청년은 왔던 길로 오토바이를 달렸다. 나는 꿈속에서 도움을 받은 사람처럼 내 눈에 눈물이 흐르는 걸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물은 차가운 것이어서 예리한 조각도로 볼을 긁는 아픔을 주었다.

내가 빠져나오기 무섭게 역무원은 역사(驛舍)의 불을 끄고 문을 걸어 잠갔다. 아까는, 그 소리가 아무런 여운도 남기지 않았다. 나는 굳게 잠긴 역사의 문 앞에 다다라, 내가 감옥에 갇힌 것을 깨달았다. 언제 열릴지 모르는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몸이 떨고 있었다. 얼마 안 가서 뼈만 앙상하게 남을 것 같았다. 옷 속에 온갖 종류의 뼈다귀들이 흩어져 있는 모양을 상상할 수는 있어도,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역사 안엔 불빛이 남아있지 않았다. 내 짧은 상식으로 비춰 봐도, 간이역이라고는 해도 숙직을 서는 역무원이 남아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문을 흔들다 두드리다 발로 걷어차기까지 했건만,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여인숙에 들어가 사정해서 잠을 잘까 생각했으나 잠을 자는 것보다는 이런 지옥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일곱 시까지만 견디면 스팀이 들어오는 기차를 탈 수 있다. 그 일념 하나만으로 문을 걷어차기까지 했건만, 역무원은 귀가 어두운 사람이 분명했다. 담뱃불 하나로 추위를 몰아내고 있었다. 한 시간을 떨다가 시간을 보면 몇 분이 지나있지 않았다. 그때, 소변이 마려웠다. 화장실의 문도 잠겨있었다. 역사 옆에 트럭 몇 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소변을 볼 생각으로 트럭들 옆으로 돌아갔는데, 흐릿한 불빛이 커튼 속에서 비쳤다. 난로의 불인 것도 같았고 잠잘 때 켜놓고 자는 흐린 불빛인 것도 같았다. 그 문은 안에서 잠겨있었다.

"문 좀 열어주세요.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그렇게 몇 번이고 문을 흔들고 걷어찼다. 한참 뒤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플래시가 켜졌다. 덜커덕 문이 열렸다. 아저씨는 말이 아닌 내 몰골에 플래시 불을 들이댔다. 나는 난로 옆에 놓인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잘 주무시던 아저씨의 훈계가 얼마만큼 지루했는지, 나는 기억해낼 수 없다. 나는 난로 쪽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청년이 타고 온 모터사이클 소리로 코를 골며 잤기 때문이다.

이윤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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