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구연이라면 '어린 오누이가 이빨을 드러내며 쫓아오는 호랑이를 피해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해님달님 중) 정도는 돼야 손에 땀을 쥐기 마련이다. 그런데 내용과는 상관없이 시종일관 구연자도 관객도 바짝 긴장한 구연대회가 열렸다. 한국발달장애인가족연구소가 28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연 발달장애인 동화구연 발표회였다.
동화 '바닷물고기 덩치'를 구연하러 무대에 오른 20대 청년 네 명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미처 대사를 다 외우지 못한 듯 두 손으로 꽉 쥔 동화책을 연신 들여다 봤다. 구연 도중 대사가 끊기고 한숨도 흘러나왔다. "어느 깊은 바다 속에 (머뭇거리다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바닷물고기 덩치가 살고 있었어요."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말하는 속도도 느렸지만 배역에 맞는 목소리 연기만큼은 일품이었다. 조태환(25ㆍ자폐성 장애 3급)씨가 책을 보지 않고 1인 3역을 하며 '무지개 연못'을 구연해냈을 때는 관객 50여명의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감기 든 여우' '몽이의 소풍' 등 10편의 동화가 40분간 구연됐다.
연구소는 지난해 2월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동화 구연 아카데미'를 열었다. 직업을 갖기 어려운 발달장애인들에게는 자아실현의 기회를, 이들의 구연을 듣는 비장애 아동들에게는 장애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취지였다. 지난해 40명의 수료생을 배출한 데 이어 올해에는 발달장애인 15명이 1년간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올해 1월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당산동 연구소 회의실에서 한두 시간씩 강사들의 구연 지도를 받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특히 6명은 11월부터 크리스마스까지 영등포구의 한 어린이집과 발달장애인들의 공동가정인 민들레의 집을 매주 한 번씩 방문해 동화 구연 자원봉사를 했다. 늘 봉사를 받던 이들이 나눔을 실천하게 된 것이다. 최근 조태환씨 등 교육생 4명이 한국동화구연지도자협회의 동화구연지도사 3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결실은 동화 구연을 통해 이들이 장애를 조금씩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김명실 연구소장은 "감정 표현이 서툴고 소극적이던 발달장애인들이 동화 구연으로 풍부한 감정 표현력은 물론 자신감까지 얻었다"며 "지역사회에 재능기부를 하면서 자신들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발표회 이후에도 맹연습을 이어갈 태세다. 정승환(25ㆍ지적장애 3급)씨는 "우리가 연습한 동화를 들려주니 어린이집 친구들이 깔깔대며 즐거워했다"면서 "목소리 연기는 지금도 쑥스럽지만 연습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한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내 친구 왕굴이' 주인공을 맡았던 신용철(25ㆍ지적장애 2급)씨는 "동화 구연을 하면 나도, 관객도 기분이 좋아진다"며 해맑게 웃었다.
조아름기자 archo1206@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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