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재임 중 맡았던 사건의 변호를 수임해 논란이 된 고현철 변호사가 수임 직후 대법원에 제출한 상고이유서에서 자신이 맡았던 판결을 네 차례나 언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오래 전 사건이라 기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검찰의 판단이나 소속 법무법인의 주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부적절한 처신에 '거짓 해명' 논란까지 더해지며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문제가 된 사건은 LG전자의 왕따 사건 피해자 정국정(50)씨가 사측의 해고 조치를 정당하다고 판단한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행정소송에서 패소한 뒤 다시 회사를 상대로 낸 해고무효 민사소송. 고 변호사는 대법관 시절 해당 행정소송에 관여했는데, 퇴임 후 법무법인 태평양으로 옮긴 뒤 해당 민사소송의 LG측 변호인을 맡아 논란이 됐다. 변호사법 31조는 공무원ㆍ조정위원 또는 중재인으로서 직무상 취급한 사건의 수임을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검찰은 변호사법 위반으로 고소 당한 고 변호사에 대해 "행정소송 당시 주심이 아니었고 사건이 많아 일일이 기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불기소 결정했다. 법무법인 태평양도 지난 23일 본보의 보도에 대해 "고 변호사로서는 관련 민사소송 사건을 수임하면서 6년 전 해당 행정소송의 판결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해명과 달리 고 변호사는 민사소송과 관련해 대법원에 제출한 상고이유서 등에서 문제의 행정소송을 네 차례 언급했을 뿐 아니라, 두 사건이 각각 행정, 민사소송이라는 점만 다를 뿐 사실상 같은 내용이라고까지 지적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2010년 작성한 첫 상고이유서에서 "(대법원에서 정씨가 패소한)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 취소의 소는 행정소송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소송기초(기본적 사실관계), 심판대상, 심리과정 및 입증책임, 소송의 목적 및 효과 등이 해고무효 확인의 소(민사소송)와 동일하다"고 적시했다. 2011년 3월에 작성한 3차 상고이유보충서에서도 "(원고가) 행정소송 판결이 확정된 이후 2005년 2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며 "행정소송과 민사소송이 보호하려는 법익은 부당한 해고를 당한 근로자의 권리 보호라는 점에서 동일하다"면서 각 소송의 시점과 의미까지 명시했다.
한편 검찰이 고 변호사를 무혐의 처분하면서 2003년 대법원 판례는 무시하고 1974년 대구고법 판례를 적용한 것도 논란거리다. 검찰은 변호사법 31조와 관련해 대구고법 판결을 인용해 "공무원으로서 재직시 직무상 취급한 당해 사건만을 가리키며, 그 사건의 사안과 동일한 내용의 다른 사안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2003년 대법원 판례는 '동일 사건'의 범위를 넓게 해석하고 있다. 대법원은 2003년 "변호사가 관여한 사건이 동일한지 여부는 사건의 기초가 되는 분쟁의 실체가 동일한지 여부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상반되는 이익의 범위에 따라서 개별적으로 판단되어야 하며, 소송물이 동일한지 여부나 민사사건과 형사사건 같이 그 절차가 같은 성질의 것인지 여부는 관계가 없다"고 판시했다. 즉 행정소송이냐, 민사소송이냐가 아니라 사건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변호사가 원ㆍ피고의 사건을 동시에 수임할 때만 적용된다고 좁게 해석해 전임 법관의 수임 제한에는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관련 조항으로 얼마나 기소하지 않았으면 40여년 전 판례를 근거로 들겠나"며 "고위 법조인에 대한 수사일수록 더 꼼꼼해야 했지만 검찰이 그러지 못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서울변호사협회(회장 나승철)는 지난 23일 고 전 대법관에 대한 징계조사위원회를 열고 고 전 대법관을 변호사 윤리 및 품위 유지 규정 위반 등으로 30일 열릴 상임위원회에 징계 개시를 건의했다. 상임위에서 이날 징계개시 결정이 최종적으로 확정되면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최종 징계수위를 결정하게 된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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